예술영화의 탈을 쓴 교육영화
독선의 착각과 개인의 승리,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

 

우리는 종종 체계적인 선행학습과 교사의 입시 테크닉이 좋은 인재를 길러낸다고 믿는다. 많은 학생은 교육을 당하는 과정에서 그 방식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지만,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는 모의고사 점수에 잠시 불만을 유예한다. 가끔 송곳처럼 삐져나오는 현장의 목소리가 있으나, 이는 성적이 능력이고 미덕인 우리 사회에서 크게 고려할만한 사안이 되지 못한다. 대개 이런 목소리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종종 오역된다. 나는 <위플래쉬>(2014)가 개봉했던 그 해, 영화관을 나서며 경험한 사회적 왜곡을 선명히 기억한다. 나에게 이 영화는 재즈 드러머를 꿈꾸는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폭력적인 스승 플렛처(J.K. 시몬스)를 만나 겪는 고통 그 자체다. 그런데 나와 함께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 이 작품은 학창시절 호랑이 선생님에 대한 감사이자, ‘입시 전문가에게 큰돈을 투자한 것에 대한 확신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강남에서 일군의 학부모가 이 영화를 빌미로 학원가에 더 빡센선행학습을 주문했다는 소식은 나를 더 당혹케 만들었다.

 

많은 관객이 <위플래쉬>를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로 기억한다. 앤드류가 플렛쳐의 지휘를 무시하고 무대를 장악하는 10여분. 연주가 끝나면 클로즈업되는 플렛쳐의 미소. 그 장면은 얼핏 학생을 엄격하게(혹은 비인간적으로) 교육하는 방식을 긍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앤드류가 플렛쳐의 가치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시절, 그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떠올려 보자. 기회를 위해 사랑을 버리고, 자만심에 차 가족을 무시하고, 사고를 당해도 무대로 달려가던 모범생앤드류 말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앤드류는 오늘의 한국 학생과 많이도 닮았다. 그 말은 곧 플렛쳐가 추구하는 가치가 우리 교육의 현실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대학가면 애인 생기니 일단은 공부하라거나 ‘3년 바짝 투자하면 남은 평생이 편하다따위의 것들 말이다. 그 노선을 따라가면 정말 성공할 수 있는지, 좋은 인재가 될는지는 모를 일이다. 씁쓸한 사실은 그렇게 입신한 인재가 또 하나의 플렛쳐가 되어 성과 만능을 부르짖을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플렛쳐 덕에 앤드류가 성장한 것 아니냐고 하신다면 한 말씀. 적어도 내게 앤드류의 성장은 드럼에 대한 개인적인 열망과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발적 연습에 따른 것이었다. 엔딩을 장식한 그 실력 또한 사고 이후 플렛쳐와 단절된 상태에서 이뤄내지 않았나. 무엇보다 앤드류는 영화가 시작하던 첫 순간에 이미 성장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는 방과 후 모두가 떠난 교정, 복도 끝 골방에서 홀로 땀 흘리며 드럼을 치는 학생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마침내 자율적인 노력이 타율적인 교육과 독선의 착각을 이겨버리던 순간의 쾌감을 여전히 잊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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