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금영길 1946년생 

사랑하는 아내 정희분, 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이며 고마운 사람이다.
사랑하는 아내 정희분, 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이며 고마운 사람이다.
군대시절, 듬직한 금병장. 50년 전 청춘의 빛바랜 추억의 사진으로 남았다.
군대시절, 듬직한 금병장. 50년 전 청춘의 빛바랜 추억의 사진으로 남았다.
한창 열심히 일하던 때의 나, 90키로가 넘는 거구였고 열정과 힘이 넘치던 젊은 시절이었다.

 

어제도 불쑥 걸려온 전화에 옛 추억을 회상했다 

"형님 거기 000 수도관이 몇 미리죠?"

땅속에 묻힌 수도관이 몇 미리 인지, 수도 업체에서 나에게 묻는다. 전문가인 그들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도시설 통으로 오래 근무했던 경험에 대한 예우이다. 물론 귀신도 모를 그 몇 미리가 내 눈에는 훤하다. 내가 옥천의 땅속 물줄기를 다 꿰고 있기에 가능한 질문이다. 군청에 근무할 때 수도관 도면과 시설 업무를 맡았었다. 나는 옥천의 물이 어떻게 흘러 어디로 가는지 훤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다. 보람도 컸지만 그 만큼 힘든 시간도 담보로 했었다. 바로 훈장처럼 얼굴에 옅은 안면마비가 왔다. 수도관 파열로 꼬박 이틀을 밤 새워 일하면서 피로도가 높아져 안면마비가 오게 됐다. 남들이 볼 때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나한테는 젊은 날 새겨진 훈장 같은 흔적이다. 나 개인의 지난 일이지만 옥천 수도 시설 역사의 단면을 그리면서 얻은 훈장이었다. 그래서 뿌듯하다.

■ 장남의 책임감은 동생들 몰래 쌀밥위에 얹어졌던 계란후라이로부터 시작됐다. 

옥천군 이원면 윤정리에서 6남매의 맏이로 1946년에 태어난 나는 영년 순자 영삼 순이 영출의 형이자 오빠였다. 동생들 이름을 불러본지가 언제인지 각자 전국으로 흩어져 사는 모습은 달라도 어머니가 홍두깨로 손수 밀어서 만들어주신 손칼국수를 후루룩 후루룩 나눠먹던 핏줄이다.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칼국수는 갖은 양념 없이도 멸치만 띄운 육수에 칼국수만 넣었어도 우린 6남매는 정신없어 먹었다. 싱겁다 싶으면 고추장 한 숟갈 풀어서 휘저으면 그 맛도 또 일품이었다. 어머니는 동생들은 보리밥줄때 나는 장남이라고 슬쩍슬쩍 쌀밥을 주시고 운 좋은 날은 밥 위에 계란후라이까지 올려주셨다. 어머님도 6남매에게 다 나눌 수 없는 형편이라 

"영길아 어여 먹어" 

하시며 빨리 먹으라고 재촉 아닌 재촉을 하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을까. 장남만 챙겨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도 이젠 헤아릴 수 있다. 

그 때는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도 모르고 동생들 태어날 때 마다 푸념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장남이라는 마음의 짐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가장 먼저 경험한 충격은 네 살 때 맞이한 6.25였다. 너무 어린 나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네 살 때 밤에 집안 식구가 군북면 골래미까지 밤새 걸어서 피난을 갔다. 잠이 쏟아졌지만 어머니 손을 꽉 잡고 걸었던 희미한 기억이다. 산골짜기로 갔던 그 골래미 피난처가 마침 지방 빨갱이 집이라 다시 대성산 밑으로 피난을 갔었다는 말은 후일담으로 부모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괴뢰군들은 식량이 없어서 부락으로 내려왔다 소도 몰고 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뺏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나고 보면 인명살상없이 그 시절을 보낸 것만도 천운이었다. 

이원국민학교에 다니던 그 당시에는 한 학급에 70명씩 6반이었다. 시골 학교에 천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다. 1950년대 이원에는 대성국민학교 지탄국민학교 이원국민학교등 세 개의 국민 학교가 있었지만 이원국민학교만 남고 두 곳은 폐교되어 쓸쓸한 교적비만 남았다. 아이들 소리로 떠들썩하던 운동장은 쓸쓸한 채로 덩그러니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노인들이다. 이원초등학교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학교가 남아있을지는 모른다. 시대가 바뀌면서 농촌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다 보니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아이 갓난아이 울름소리 들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른다.  

■ 15살, 바다를 처음 보며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다.

나는 윤정리에서 이원초등학교를 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때 인천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인하공대 다니던 당숙이 나에게

"영길아 너 인천 와서 공부해볼래?"

라며 도시에서 공부하자며 나를 회유하셨다. 옥천 이원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던 때 부모님도 나도 용기를 내는 결정이었다. 인천으로 올라가 백인엽씨가 재단이사장인 서린 중학교에 입학했고 서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천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고 당숙 따라 유학길에 올랐고 바다를 처음 보았다. 작은 시골에서 살던 촌아이가 바다를 보면서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서린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 청춘의 방황도 잠시 겪었다. 진학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잠깐 배를 타기도 했다. 인천에는 팔미도라는 섬이 있었다. 월미도 다음 섬으로  큰 배는 팔미도에 정박하고 연안부두에서 작은 배로 어부들을 실어 날랐다. 그 배에 조수 일을 했었다. 그리고 옥천 철도에서 근무했는데 대전 보선국 옥천 선로반에서 1년 근무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장남이면서도 농사일도 많이 거들지 않았는데 그래서 직업도 농사 일이 아닌 기계 관련 업무로 수십 년을 일해왔다. 

군대는 1968년도에 증평 훈련소 1기생으로 군대에 갔다. 우리가 군대 가던 그해에 김신조일당이 1968년1월 21일 청와대로 내려오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의 목을 따러 왔다는 그 말이 전국에 충격을 주었다. 전군의 경계가 서슬 퍼런 시절이라 그해 군대 간 군인들은 다들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철통 경계는 혹독한 훈련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45년생 46년생 들이 군에 가서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 강원도 원통 인제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인제는 이제가면 언제오나라는 그 말이 대변하듯이 참으로 먼 곳이었다. 군 생활이 아니라 유배를 떠난 곳 같았다. 36개월을 꼬박 채웠고 15키로 모래주머니를 양다리에 차고 지옥 훈련을 견뎌냈다. 

■ 다시 내 고향 이원으로  돌아오다 

제대 후에 옥천 동이면 하동정씨 49년생 정희분과 결혼했다. 1972년 2월 1일 날 인천에서 결혼하고 큰 아이를 낳은 뒤 이원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원으로 와서 새로운 직장 국제종합기계 입사하게 됐다. 농기계 전문회사라 기계 검사과에서 10년 근무했다. 모든 농기계는 내 도장이 찍혀야 출고되는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트렉터 시험 한다고 김제까지 가서 파견 근무하며 3개월간 마모상태와 기계 조립 후 어디가  빨리 부서지나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기계와의 인연은 계속 되었다. 

국제종합기계에서 10년을 근무하고 다음에 내가 만난 직장은 군청상수도 공무원이었다. 옥천군 상수도 관로는 지금도 도면을 다 알고 있다. 시내 관로 시설의 모든 작업에 참여했다. 2000년도에 12월  기능직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19년 1개월의 시간이었다. 

집에서 자다가도 누수 신고나면 밤중이라도 달려가야 했다. 수압 때문에 위험한 상황이 몇 번 있었지만 큰 불상사 없이 퇴직 할 수 있었다. 지난 시간의 훈장으로 생각하는 안면마비가 온 것도 한창 관로 현장에서 열심히 일할 때였다. 그날도 숙직하고 가와리 길에 수도 관로가 터져서 하룻밤을 새면서 이틀을 꼬박 새웠다. 피로도가 겹쳤는지 풍을 맞았다. 업무를 마치고 얼굴 근육이 부자연스러워서 만져보니 딱딱한 기운이 불길했다. 다음날 다시 회복 될 줄 알았더니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대로였다. 한의원에 가서 침이며 보약이며 온갖 치료를 했지만 옅은 그림자는 남게 되었다. 속상한 마음도 컸지만 돌이켜보면 옥천의 관로들이 내 손을 거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일하는 와중에 생긴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사는 인생에 값을 치루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뿌듯하다. 지하수 관리 누수 탐지 할 때는 간간이 청진기를 벽에 대고 쏴아 쏴아 물소리를 들으면서 근접거리를 알아내기도 했다. 설마? 라고 반문하기도 있겠지만 '한 가지 일을 하다보면 도가 튼다'는 말을 그럴 때 쓰는 말이다.

관로 공사는 하천바닥으로 관로 땅을 파고 하는 일이라 대형사고가 날수도 있는데 무탈하게  퇴직한 것만도 감사했다. 생각하면 가슴이 뜨끈하다. 

■ 노인 회장으로 분주하고 유익한 일상이 노년의 기쁨이다. 

노인 회장은 4년 전부터 이원 분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원에 노인정 34개, 한 리에 3개  2개 정도 노인정이 있다. 노인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생활하도록 나도 매일 분주히 발길을 옮긴다. 행사 때는 많은 노인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무대에 나가 인사말과 마이크 잡은 김에 '잘 있거라 부산항' 한 곡조 부르며 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런 일상들이 즐거움이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알콩달콩 평생의 벗으로 살고 있다. 나이 들어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청춘을 받쳤던 일들이 지금도 흔적이 남아 옥천의 역사가 되었다. 

또 걸려온 전화기 너머로 

"형님 000 어디부터 막고 공사를 해야 할까요?"

나이든 나에게 후배들이 오래전 내가 만들어놓은 관망도를 다시 물어본다. 흐뭇한 마음에 씩 웃어보지만 마음껏 웃을 수 없다. 오래전 그 날의 일로 얼굴 근육은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속상한 마음보다는 지난 인생에 자부심으로 남았다. 이만하면 자존심을 지켰고 

'이원사람  금영길'  노인회장 이름표에 당당하다. 지난날들 동행해준 아내 정희분여사와 우리 아이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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