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마지막 꿈, '이원묘목공원에 그의 미술관을 세워 명소로 만드는 것’
100여 점 넘는 작품과 그가 가꾼 예술 조경수 기증의사 밝혔지만, 감감무소식
나무에 하는 서각미술과 묘목과는 잘 맞아 앙상블, 이제 유통을 넘어 문화를 고민할 때

동이면 석화리 그의 작업실에서 사진을 찍었다.
동이면 석화리 그의 작업실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원면 현남리 출신, 칠남매 중 다섯째, 여성단체협의회장을 역임한 강비옥씨가 큰 누나다. 현산 강민(65, 동이면 석화리), 멀리서 보면 거뭇거뭇한 큰 산이 보일듯 말듯 하다 하여 지어진 호 현산, 그는 이원묘목축제에 단골 초대 손님으로 전시회를 하곤 했다. 본명은 강노형이다. 가 창시하고 운영하는 서각미술대학 다음 카페에는 3천명의 회원이 가득 차 있다. 서각은 익히 들어봤지만, 서각 미술은 생소한 분야다. 글씨 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나무에 양각을 한다. 글씨만으로도 어려운데 섬세한 그림의 필치까지 양각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미술 분야를 만들었다. 기존 미술로는 학벌도 인맥도 없는 그가 설 곳은 없었다. 처절하게 경쟁하는 상업미술바닥에서도 성공한 그는 이제 본인이 하고 싶은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원초등학교, 이원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극장판에 뛰어들어 간판을 그렸던, 그림을 현장에서 배웠던 그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남들처럼 대학도 유학도 가지 못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돈을 받았다. 주민들의 기호와 시대상에 철저하게 부합되는 그림을 그렸던 그가 이제 그의 작품을 매만지려 한다. 그리고 고향에 오고 싶었다. 하염없는 그리움으로 뿌리가 전하는 애착으로 불쑥 그는 고향에 왔다. 미술관을 번듯하게 지어 금의환향하고 싶었지만, 이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동이면 석화리 임길재 이장을 통해 마을 큰 창고를 빌려 지금까지 그렸던 작품을 걸어놓고 아예 거주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 3년째이다. 고향에 오면서 그는 예술 조경도 시작했다. 세산리 땅을 빌려 모과나무, 두충나무, 보리수나무, 소나무, 홍매화, 매화 등 각종 나무를 심어 수형을 매만지며 살아있는 나무 하나가 작품인 나무들을 만들고 있다. 매일 시도 쓴다. 매일 쓰느 시는 독자가 프린트해 전권을 보내줄 정도로 애독자가 많다. 어릴적 그림으로만 모아졌던 그의 예술성은 사방팔방 영역을 확장하며 만개하고 있었다. 

50년 전 중학교 시절에 그린 작품, 친척이 건네줬다.
50년 전 중학교 시절에 그린 작품, 친척이 건네줬다.

 

 어릴적부터 그림에 유별나게 소질있던 아이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중학교 떄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팔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았고 인기도 꽤 많았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칠남매 중 다섯째, 가정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실전 그림을 더 배워보고 싶은 열망에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대전 극장통으로 갔다. 처음 들어간 신도극장에는 1년 동안 아예 보수를 받지 않고 일했다. 나름 견습기간이었던 셈이다. 극장 미술부에서 이소룡, 배삼룡, 찰턴헤스턴 등 인기 영화배우 얼굴을 그렸다. 그의 그림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극장 간판에 큼지막하게 그림을 거의 매일 그리다시피 하면서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대전시민회관에서 2년 동안 그리다가 중앙극장에서 1년을 그렸다. 대전 극장통에서 4년 꼬박 배우고 그는 부산 남포동 제일극장으로 진출했다.  그렇게 무려 5년 넘게 갈고 닦은 미술 실력으로 ‘그리다’란 간판을 걸고 본격적으로 상업미술을 시작한다. 

돈을 벌고 싶었고 돈이 되는 그림을 잘 그리기도 했다. 관공서 등 기관과 기업에서 숱하게 이순신 해전도 같은 기록화와 각종 벽화를 그렸고, 작품을 의뢰받으면 원하는 작품보다 훨씬 잘 그려서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극장 간판 등 큰 그림을 오랫동안 그려왔던 터라 그리는 것은 도가 텄다. 산전수전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정말 열심히 그렸다. 

경상남도를 다 접수하기 위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마산으로 가게를 옮기고서도 그를 찾는 사람은 더욱 늘었다. 돈을 원없이 많이 벌 정도로 그의 사업은 호황을 맞았지만, 한켠에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다. 

소비자의 욕구대로 그려주는 그림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성 있는 것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유화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학벌과 인맥이 없는 그로서는 기존 화단에서 똑같은 유화로 승부하기엔 힘들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렇게 서각미술을 시작했다. 그가 지난해 옥천예술에 기고한 서각미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서각의 뿌리는 문자가 나오기 이전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언어전달이나 기록 또는 인간의 소망을 기리는 종교의식 등의 표현으로 고대인들의 생활습관이나 모습등을 담을 원시화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서각은 전통 서각과는 달리 현대에 어울리는 글씨와 신소재 물감을 써서 회화적인 미를 구상하여 현대 주거환경과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서각 미술을 창시하며 그 분야에 대가가 되었다. 

 

부산과 마산 거쳐 대전, 옥천으로 

 2010년 쯤 마산에서 거처를 대전으로 옮긴 후 현산서각미술관(대전 중구 용두동 소재 )을 운영하고, 2015년 7월20일에는 옛 충남도청사에 있는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서 서각미술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어떤 작품은 하루에 뚝딱 만들고, 어떤 작품은 6개월 남짓 걸렸다. 그 때부터 고향으로 가겠다는 그리움이 싹텄다. 카카오스토리와 네이버밴드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그는 카카오스토리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내 고향 옥천은 옛부터 살기좋은 고장이다. 살기좋은 고장이라 뭔 말이 필요하겠나. 금강이 굽이쳐 흐르며 그 주변의 경관을 아름답게 자아내 향수 100리길이 조성되었고 기름진 땅에는 포도, 복숭아, 감자, 옥수수 등 먹을거리가 풍부한 고장이다. 그런데 이런 살기좋은 옥천에 안타까운 것은 문화예술을 펼치는 미술관이 하나도 없고 문화예술을 전수하는 곳이 없다는 것이 어찌보면 그 명성에 부끄러운 마음이다” 그가 고향에 미술관을 짓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그의 비판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봄에 묘목축제, 지용제, 포도축제 등을 보면 일관성이 없이 가수나 부르고 먹자판이나 벌리는 축제로 어찌보면 내용도 실속도 없는 축제다. 문화예술이 없는 고장은 암흑의 고장이고, 이 아름다운 옥천에 전국의 예술인들이 모이는 미술촌, 미술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에 나는 내 평생 피와 땀으로 창출한 내 자식같은 작품을 옥천에 기증하여 후학을 배출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의 고장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는 7년 전부터 작품을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고향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릴 것 같았던 그에게 꿈에 그리던 생각들이 막히자, 작품을 계속하지 못했다. 

 

 아직 못다 이룬 꿈, 이원면에 그의 미술관 세우는 것

그런 그에게 아직 못 다 이룬 꿈이 있다. 고향 이원 묘목공원 인근에 본인의 이름을 건 미술관을 짓는 일이다. 옥천군에 여러번 제안을 했지만, 그리고 석화리 개인 작업실 겸 전시 공간을 여러번 다녀갔지만.  아직 답이 없다. 미술관 부지와 건물을 마련해주면 그는 100여 점의 작품은 물론, 향후 만드는 작품까지 무상으로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지금 땅을 임대해 예술조경 1농장, 2농장에서 키우고 있는 각종 조경수도 무상으로 미술관 조경수로 무상으로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이원은 고향이기도 하지만, 묘목 즉 나무로 작업을 하는 그에게 연관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묘목이 유통만 하지, 아직 문화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그가 창시한 서각미술은 어떤 활로를 뚫을 수 있을거라 내다봤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제 작품들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각종 나무를 바탕으로 제작하는 예술품입니다. 한 작품당 수천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현재 미술품 시장에도 거래되고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습니다. 다음카페 서각미술대학에 3천명의 회원이 있을 정도로 나름의 인기도 있습니다. 만일 이원묘목공원에 제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짓는다면 묘목공원을 방문하는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서각미술을 하는 수강생들에게 강의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나무에 그림과 글씨를 새기는 체험도 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제안을 했는데 그래서 공무원들이 몇번 와보기는 했는데 감감무소식입니다. 안타깝죠.”

 그 동안 고향에 집착했는데 이제 본인의 가치를 알아주는 어느 지역이라도 있다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예술을 알아주는 풍토, 문화를 만들려는 기반, 이런 것들이 아직 옥천에는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석화리에 작업실 및 전시 공간을 열었다니까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견학을 오겠다고 해서 일부러 60만원 가량을 들여 책상 의자도 사면서 준비했는데 한번 왔다 가더니 감감 무소식이더라구요. 최소한의 비용이라도 입금될 줄 알았는데 연락도 비용 입금도 없었습니다. 실망이었지요”

 

동이면 석화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가보자 

할아버지는 밥 빌어먹을 환쟁이 놈이라고 호통을 치셨지만, 그래도 고향에 돌아오니 그가 어릴적 바가지에 그렸던 농악하던 장면을 건네주던 친척이 있었다. 거의 50년 된 작품이다. 4번 국도를 따라 그가 거주하고 있는 큼지막한 마을창고 석화리로 함 가보자. 도로 인근 주차 공간이 제법 너른 그 곳에 가면 특별한 작품들과 마주할 수 있다. 낡은 건물이지만, 벽화를 그려놓아 이색적이고 입구에 서 있는 솟대도 인상적이다. 석화리 그의 미술관을 둘러보고 그의 서각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옥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 길 옆에 있는 예술조경 1농장에 가보자. 거기 가면 분재와는 또 다른 살아있는 조경수 수형이 얼마나 멋지게 자랄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공들여 만든 작품들이다. 

삐쭉 솟은 200년 된 모과나무도 있고 자두나무, 두충나무, 홍매화 등 꽃이 필 시기에 가면 더욱 볼거리가 풍성하겠다. 십대때 탈출하듯 떠난 고향에 그는 환갑이 지난 나이에 환향했다. 그의 꿈은 아직 유효한데 받아줄 그릇이 요원해 보인다. 묘목 축제 때마다 선보였던 서각미술을 기억하신다면, 지난번 미술협회 전에 그의 작품을 기억하신다면 근원을 찾아 동이면 석화리로 미술관 여행을 떠나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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