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가을이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그가 간다고 세월을 탓하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저물어가는 들녘에 나가 겨울 준비를 서두른다. 주근주근 비가 내리고 나면 동장군의 위세가 하늘을 덮을 것이다. 긴 겨울 노래가 대지를 잠재울 시간이다. 

점심을 고구마로 갈음하고 밖으로 나간다. 걷는다는 것은 나에겐 생존의 길목이다. 그냥 걸으면 좋다. 걷다 보면 모든 것이 내게로 온다. 가슴이 답답한 무엇인가가 머리를 흔들 때, 나는 그냥 바보처럼 걷는다. 걷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들녘을 걷다 보면 대화할 상대가 적지 않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전하는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비어 있는 듯 보이지 않는 질량으로 충만한 소리를. 두둥실 떠가는 뭉게구름은 덤이다. 고개를 숙이면 발밑에 채이는 돌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를 펼친다. 풀 한 포기와 대화를 나누며 벌레, 새들과 대화를 하면서 걷다 보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란 오만함을 몸소 실감할 수 있다. 빛나지 않으면서도 보물인 것들이 너무도 많다. 모두가 생명을 떠받드는 보물이다. 미미한 개체마다 온 우주가 듬뿍 담겨, 숨 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렇게 나는 걸으면서 자연에서 참 생명의 모태를 발견한다.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자궁'임을 새삼 실감한다.

욕심이란 '신기루'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다 이룰 것 같고, 도달할 것 같지만 그놈은 묘한 함정을 지니고 있다. 가도 가도 도착할 수 없는 종착역이 바로 그놈이다. 손에 닿을 듯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 비우는 것이 상책이다. 욕심을 비우면 귀신도 순한 친구가 되어 스스로와 돕는다. 왜냐하면, 풍요로움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으로서 향유할 때 내 것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이나 문명이 발달한 현대나 인간의 삶의 모습은 똑같다. 이를 방증하듯 2,000년 전에 선인들은 우리네 삶을 이미 예견했다.

『 장자 』의 '소요유(逍遙遊)'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뱁새가 깊은 숲에 들어도 몸을 의지하는 것은 나뭇가지 하나뿐이요, 생쥐가 강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마음 부자가 된 느낌이 든다. 이것도 작은 복은 아니다. 쩔뚝거리며 걷는 발걸음마다 힘이 붙는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발걸음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인 것 같다. 오늘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발걸음 닫는 곳마다 뭇 생명이 서로가 하나가 되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작은 보람이 아니다.

부처님은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천지와 내가 한 뿌리요, 만물과 내가 하나다."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만이 만물의 영장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우리들 곁으로 오겠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질문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으로." 욕심만 내려놓으면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묘음(妙音)이요, 처처가 극락인 것을. 산새가 우짖고 꽃들이 피어나는 저마다의 자리에 이미 하느님이 와 계심을 알 수 있단다. 하늘나라가 아니, 극락이 어느 곳인가를 확연히 성찰할 수 있음을. 이렇듯 진실은 늘, 가까이에 와 있지만 우리는 전도된 가치관에 매몰되어서, 죽는 날까지 만족을 모르면서 방황을 거듭하는 것 같다.

걸으면서도 역시 '날라리 땡초'같은 생각을 벗어나질 못한다. 모두가 전생의  두터운 업이다. 오늘도 우리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세상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 자연에서 배울 바가 많다. 자연이 인간의 영원한 모공인 이유는, 베풀되 했다는 생각 자체를 비우는데, 영원성이 존재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런 생각 자체를 유도하는 것이 자연이요, 걷기의 힘이다. 그 자체가 힐링이다. 모두가 빛나는 생명의 보물로 참다랗게 존재할 기회를 준다.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으면서 존재하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구부려지는 날'은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다. 하늘이 대기를 구부려 솜털 같은 뭉게구름을 펼쳐 놓는다. 

청산도 뒤질세라 빙그레 웃으면서 나무를 구부려, 만산홍엽의 잔치판을 펼쳐 놓는다. 걸으면서 무심(無心)의 필체로 펼쳐지는 자연의 숨결을 읽는다. 하느님만이 부를 수 있는 '자연의 노래'를 몰래 훔쳐보는 재미가 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다. 날아갈 것 같다. 쩔뚝거리면서 힘겹게 산책을 한 땀의 보람이 열매로 맺어지는 순간이다. 아픈 만큼 성숙하는 이치와 상통하리라.

이제부터는 나를 구부려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차도 한 잔 옆에 준비돼 있다. 황금 싸라기 같은 초겨울 햇볕이 빈방 안 가득히 스며든다. 

말 없는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쏜가. 마음이 머무는 갈피 속엔 충만과 감사만이 차곡차곡 쌓인다. 금과 은, 아니 다이아몬드만이 보물은 아닌 것 같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보물처럼 빛나는 날이다. 

미미한 일상 속에서 대우주와 합궁을 하는 기분 좋은 날이다. 모두가 님들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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