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누동리 누동학원에서 만난 아이들
윤 시인과 함께 교사로 일했던 이우인씨 인터뷰(2)

[기획-옥천 인물발굴 윤중호(10)] 스물여섯, 1980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의 시간. 윤중호 시인이 군대를 제대하고 안면도 한 재건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이 시기는 사실 윤중호 시인의 삶을 돌아보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때다. 한 사람 인생에서 6개월이라 치면 긴 시간도 아니고, 무엇보다 안면도에서 교사로 봉사했던 시기 잠깐 만났던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찾을 수 있다는 말일까, 싶었던 거다. 합리화하고 있을 때 '아니지, 역시 한 번 찾아봐야지' 생각이 들게 만든 시가 한 편 있다. 

"우리들의 꿈은 헛된 것이었을까?//세상 가득히 몰아치던 겨울비 잦아들고, 문득/눈시울 붉히는 섬의 끝/간석지에서, 죽은 목숨처럼 뿌리내리고 있는/산조풀들.//아! 헛된 것이었을까?//간기에 말라/빨갛게 타오르는 줄기를 곧추세우고/아직도, 간석지에서 흔들리는/우리들의 꿈.//해지는 곳에서 새벽을 키운다." '해지는 곳에서 새벽을 기다린다-다시 안면도에서' 중

시 '해지는 곳에서 새벽을 기다린다-다시 안면도에서'는 93년 출간된 시집 '금강에서'에 실린 시 중 한 편이다. 첫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가 88년에 출간됐으니, 적어도 '해지는 곳에서 새벽을 기다린다-다시 안면도에서'는 윤 시인이 누동학원을 그만두고 10여년이 훌쩍 지나서 쓰여진 시라는 말이다.

윤 시인이 안면도에서 찾았고 또 10여년이 지난 날에서도 묵묵히 품에 안고 있던 '우리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누동학원에서 지냈던 시기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운 좋게도 당시 교사로 함께 일했던 이우인씨를 만나 누동학원에서 낸 누동학보 등 많은 자료를 얻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았던 탓에 윤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이것을 쓰는 게 좋을까 쓰지 않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누동학원은 윤 시인이 아껴온 공간이고, 또 기록이란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것이 낫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다보면 언젠가 한 사람이 소중하게 여겨온 꿈 하나는 알 수 있겠지, 생각한다.

이우인씨 인터뷰는 이번으로 마무리된다. 언젠가 또 누동학원 관계자를 만나게 되면, 당시 시인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만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다시 이 시절 이야기로 돌아와 글을 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동학원 제4회 졸업식 사진. 누동학원은 이듬해 제5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사진제공: 이우인씨)

안면도 누동학원을 세운 건 안면도와 가까운 태안이 고향이었던 김한택 선생과, 그 뜻을 함께 했던 길경렬 선생이다. 두 사람은 공주사대 서퐁세 교수 신부의 도움으로 76년 안면도에 학교 부지를 사고 누동학원을 지었다. 

이우인씨가 누동학원을 알게 된 건 길경렬 선생과 만나서다. 이우인씨는 충남대학교 원예과를 나왔다. 길경렬 선생은 충남대 농학과를 나왔고, 원예과 교수가 그의 친구이기도 해서 종종 연구실에 들리곤 했다. 이우인씨는 대학 과 사무실에서 길경렬 선생을 만났다. '세상에 저렇게 선한 인상의 사람도 있네' 생각했단다. 

길경렬 선생이 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섬에 학교를 하나 지었다는 것, 또 그 학교가 돈은 물론 일할 교사도 부족해 항시 허덕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우인씨는 집에 가 곧장 짐을 쌌다. 마침 대학 졸업 후 다니기 시작한 직장도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정말 가난했어요. 먹을 것도 없었으니까요. 교육봉사 온 교사들은 대부분 돈 버는 사람이 아니라 대학생들이어서, 학교를 후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거나 마을에서 챙겨주는 쌀, 반찬같은 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원예과답게(?) 운동장 귀퉁이에서 상추씨를 뿌리고 농사짓기로 했죠(웃음). 윤 시인도 함께 밭 갈고 씨 뿌리고 했는데 솜씨가 보통 솜씨가 아니었어요." (이우인씨)

지금이야 돌아보며 말할 수 있는 일이니 웃을 수 있다.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학교 안팎을 오가며 학교 재정을 도왔던 전영숙씨가 쓴 수필집을 보면 이우인씨가 전영숙씨에게 썼다는 편지글이 나온다.

“전 선생님! 저도 별 수 없네요. 볕살에 영그는 탱글탱글한 아이들을 보다가 무능한 선생들, 늘 배고픈 선생들을 보면 왜 그리 초라해 뵈는지 눈물이 나네요. 운동장 귀퉁이에서 상추 쑥갓은 또 왜 이리 미친 듯 커 올라오는지 야속하기까지 해요. 그거라도 먹을 게 있으니 고맙긴 하지만, 이젠 그거 한 가지 오른 밥상에서 모두 상추 쪽으로 눈을 흘기게 돼 버렸으니.” 전영숙 수필집 ‘다락골 연가’ 중

누동학원을 찾은 대학생들 도움을 받아 연극공연을 올린 누동학원 학생들. (사진제공: 이우인씨)

■ ‘미루나무 이파리는 흔들리면서 파래져 간다’

가난이 누동학원 교사들에게만 해당했을 리 없다. 입학금을 내지 못해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누동학원에 온 학생들도 많았던 만큼, 안면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해당했다. 농번기가 되거나 갯벌에 나가 일해야 할 때가 되면 학원에 나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부기지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떡하겠어요...(웃음)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라는 게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어떤 것은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우인씨)

"우리 동네는 퍽 가난한 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 일이 없을 때 술집으로 간다. 아침 일찍  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 보면 '비틀비틀' 꼭 원둑에서 떨어질 것 같다. 그렇게만 하면 말도 안 하겠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 놀라게 할까./또 아주머니들은 썰물 때 나가셔서 조개나 굴을 잡아오신다. 우리 마을에서 조개를 잡아 오려면 배를 타야 한다. 들물이 되어서 들어오실 때 보면 옷은 젖고 입술이 새파란 데다가 바구니가 몇층으로 인 모습이 수학에서 배운 가분수라 했지/하여튼 우리 동네는 인정도 많다. 누구네가 슬픈 일이 생겼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서 위로 해 주곤 한다" 80년 누동학보 제26호에 실린 글, 누동학원 3학년 박 열 '우리동네' 중

학생들이 어떤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학교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부모와 마을, 각각 삶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운다. ‘흔들리면서도 성장한다’. 이는 윤 시인이 학생들 글을 모아 만들었던 누동학보, 그  첫머리에 쓴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치 앞 땅만을 보고 걸어다니는 아이들은, 자꾸 빈 하늘을 올려다보는 애들은 자꾸 부끄러워 입을 가리고 웃는 애들은,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보리 익는 소리가 들린다./바람이 불 때마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걸어가는 애들의 걸음걸이가 위태롭다.//그래서 놈한테 그렇게 씁쓸한 바다냄새가 풍기곤 했구나/답답할 때마다 놈이 뒤지고 다니던 그 바닷가의 갯바닥이/의점,염전 소금목도를 메시는 아버님의 패인 어깨가/의점, 살벌한 갯가에서 조개를 캐시는 어머님의 거친 손이 아주 안쓰럽다고 자꾸, 움츠러들던 놈였는데,//(중략)//미루나무 이파리는 흔들리면서 파래져 간다./파래져 가면서 흔들리기,/흔들리면서 파래져 가기." 윤중호,80년 누동학보 제26호에 실린 글,―다시 학보를 내면서’ 중

“지금도 학생들이 ‘선생님’하고 연락해 와요. 사실 나이 차이도 7~8살밖에 되지 않아서 이제는 선생님 소리도 조금 면구스러운데...(웃음) 정말 잘 자랐어요. 편견 없이 각자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고, 직업을 갖고 자기 역할 다하면서 살고 있어요. 식당을 운영하는 친구도 있고 장애를 딛고 금세공 일을 하는 친구도 있어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선생님보다 학생들이 더 잘 자란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해요.”

이우인씨가 국화꽃잎처럼, 빙그레 웃었다.

97년 촬영한 누동학원 터. 지금은 건물도 남아 있지 않다. (사진제공: 이우인씨)
97년 촬영한 누동학원 터. 지금은 건물도 남아 있지 않다. (사진제공: 이우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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