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삼양리 황응기 (1945년~ )

내 인생이 유행가 가사의 한 소절과 너무 닮았다.
'산 너울에 두둥실 홀로 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
한 송이 구름 꽃을 피우기 위해 떠도는 유랑별처럼 내 마음 별과같이 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경기도 여주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터를 옮기며 방랑의 세월도 보냈다. 옥천에 자리를 잡은 지 30년, 내 노년의 안식처 옥천에서 봉사를 낙으로  살고 있다. 일흔이 넘었어도 아직 마음은 청춘이다.

 

 1962년 한양공고 재학시절, 기개있는 풍채는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

■ 열네 살, 서울 유학길에 오르다 

아버지는 골수염으로 고생하느라 농사일도 일상생활도 너무 어려웠다. 당신의 녹녹치 않은 환경 때문에 내가 면서기라도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기 원하셨다. 여주는 토양이 비옥해서 쌀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우리 집도 농사를 지어 남들에게 장리쌀을 주면서 살던 넉넉한 살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셔서 일상생활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장남인 내가 고단함 삶을 대물림할까 염려되어 서울로 유학을 권유하셨다. 낯선 곳 서울에서 열네 살 짜리의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서울 한양중학교 때부터 동대문에서 생활하면서 혼자 사는 방법을 차차로 익혀갔다. 서울 유학길에 혼자 오를 생각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봐도 그때부터 배짱은 두둑한 편이었다. 자취생 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지만 마음을 달래준 건 바로 자취집 딸내미 순이의 존재였다. 슬쩍 슬쩍 훔쳐보면서 마음속으로 애간장도 태우고 순이 보는 낙으로 외로움도 이겨냈다. 등교 길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낭창낭창한 모습에 더 마음 설레었다.

나는 유년부터 체격이 좋고 달리기를 잘했다. 한양중학교 때는 공을 잘 차서 당연한 수순으로 축구 명문 한양공고에 진학을 하게 됐다. 

당시 영등포 공고 한양공고와 동북고등학교가 축구명문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이던 때 1960년 4월19일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며 부정선거에 거센 반발이 일었다. 당시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 고등 학생들도 거리 시위에 참여하였다.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부패한 독재 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린 이 거대한 움직임은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큰 사건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난 다음 내각 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총선거를 통해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장면을 총리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다. 제2공화국이 출범한 것이다. 시위가 불이 붙듯이 퍼져 갈 때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고 쓴 깃발을 들고 시위 하였다.  

내가 축구에 정신을 빼앗겼을 때 4.19혁명에 참여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거리로 나가고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나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지만 공을 차면서 얻는 희열이 더 컸다. 그 때는 확실한 마음의 근거는 없었지만 그 친구들한테 빚을 졌다는 부담감이 마음 한 편에 자리 잡았다. 나도 사나이였다. 

학교 다닐 때는 학생들이 통학수단으로 전차를 타고 다녔는데 달리기를 잘했던 나는 정거장 마다 쉬는 전차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왕십리에서 을지로까지 걸어가는 게 더 빨랐다.

행당동에서 정릉 미아리 고개 넘어서 한 시간 이상 걸었지만 전차를 타는 것보다 걷고 뛰던 그 통학길이 10대의 나에게 맞았다. 

군에 가기 전 결혼을 하고 군대에 다녀왔다. 아내는 충북 음성 금왕이 고향인 아가씨로 나는 결혼하고 아내에게 마음의 짐을 지어주며 군복무를 시작했다. 제대 후 돌아와서 부모님과 같이 농사도 짓고 아버지는 절을 짓는 대목수여서 그 현장에서 일을 배우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으로 발전하면서 한창 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전국의 건설 현장으로 다니기 시작했고 가족들과 연락도 뜸한 채 나의 갈 길을 가는 부평초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됐다. 

■ 무연고 벌초, 부채의식을 덜어내다 

1990년 45살에 옥천에 왔다. 30년 살았다. 옥천은 제 2의 고향을 넘어 내 인생의 마무리를 할 곳이다. 한창 건설 붐이 일 때 전국의 각지로 현장 일을 하면서 바쁘게 일터를 옮겨 다녔다. 

여주 본가는 아내에게 맡기고 방랑객처럼 내 일을 하고 다녔다. 돌이켜보면 가족들에게 참으로 무심했었다. 30년 전 문정주공 2단지 아파트를 건설할 때 오게 되서 지금까지 옥천에 살고 있다. 방랑객처럼 살면서 가족들에게 연락을 소홀히 하던 차에 충격적인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아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 수시로 연락이 가능하지만 30년 전의 사회적 여건으로 그런 불행한 일들이 있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가족을 돌보지 못했던 죄책감에 사로잡혀 힘들었다. 그렇다고 일상을 놓을 수도 없었다. 사람은 다시 또 그렇게 살아진다. 

우연한길에 양수리 묘지를 지나다 사람 손길을 찾아볼 수 없는 묘를 발견하게 됐다. 풀이 무성한 묘가 내 인생처럼 쓸쓸해보였다. 그냥 지나치면 마음 한 편이 무거울 거 같아서 장비를 가져가서 말끔하게 벌초를 해주었다. 생면부지의 묘는 깔끔히 단장한 모습으로 나를 흡족하게 했다. 어깨의 큰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우리 가족에게 갖고 있던 죄책감이 커서 무연고 묘의 벌초를 해주면서 내 마음 어딘가의 짐을 조금 덜어 냈던 거 같다. 이후로 산에 갈 때마다 무연고 묘지를 찾게 되고 장비를 들고 다시 벌초를 하게 되었다. 

마음 깊숙한 곳의 울림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가족을 챙기지 못했던 그 부채의식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벌초 후에 마음의 짐들이 하나씩 내려졌다. 벌초 봉사가 내 아픔과 무관하지 않았다. KBS '6시 내 고향' 프로그램에서 무연고 벌초를 하는 나를 방송에 내보내주기도 했다. 

양수리 벌초 이후로 10여 군데 혼자서 더 벌초를 하게 되었다. 풀이 무성한 묘지를 볼 때면 먼저 간 부모님과 아내 생각에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70살이 훨씬 넘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벌초를 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벌초 하면서 벌에 쏘인 흔적들이 훈장처럼 남았다. 벌초는 예초기보다 더 무서운 복병이 바로 벌이다. 예초기는 위험해도 내가 조심하면 되지만 이놈의 벌들은 어디서 날아와 한방 쏘고 가면 속수무책이다. 벌초하면서 벌에 쏘여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무연고 벌초는 가장 보람 있던 일들이었다. 

폭설 피해현장에서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복구하고 있다. '옥천의 맥가이버'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보람이 컸던 봉사활동이었다.
폭설 피해현장에서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복구하고 있다. '옥천의 맥가이버'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보람이 컸던 봉사활동이었다.
2004년 옥천지역 폭설 피해 복구현장에서의 봉사활동으로 행정자치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 사고의 현장에 나타나는 옥천 맥가이버

2004년 옥천에 폭설이 내렸을 때 옥천 맥가이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에는 복구 작업을 돕는 손길로 13일간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하루 일당이 센 목수 수입을 포기하고 13일간 폭설 피해 현장에서 복구 작업을 도왔다. 우선 다 쓰러진 비닐하우스를 보고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동이면 평산리 무너진 포도밭 하우스 철거작업과 마을의 축사와 비닐하우스, 양수리 일대 인삼밭 등에서 복구를 도왔다. 그 외에도 독거노인 목욕봉사 모내기철 일손 돕기 봉사활동을 계속 했다. 옥천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바로 출동했다. 걸어 다니는 119가 되었다. 지금은 나이 들어 예전처럼 사고현장에 나가 몸을 쓰는 일은 쉽지 않지만 60대 때만해도 날라 다녔다. 아직도 봉사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시장 상인들에게 각종 고지서를 나눠주고 화재 예방을 해드리는 일들을 하고 있다. 

■ 노년의 쓸쓸함은 봉사로 달래며 따뜻하게 

옥천 시장 통은 내 생활의 근거지이다. 활기찬 공간을 오고가는 것이 노년의 우리에게 활력소다. 장날이면 이런저런 좌판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며 손에 한 아름씩 장을 본다. 이따금 손주들 손잡고 걸어가는 우리 또래 노인들을 보면 부럽다. 하지만 인생의 숙제는 누구나 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여건 안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이다. 폭설로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복구하며 눈가에 영광의 상처도 얻었다. 이젠 심폐소생술도 배웠다. 누군가 생명이 위태로울 때 내 손길로 긴급 상황을 넘길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한 번 더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열일 곱 순정이 있었다. 60년의 세월을 거슬러 하숙집 딸 순이를 향한 마음의 고백도 해본다. 

'순아 눈을 감으면 너의 모습이 아른 거린다. 세월이 철없이 뛰어 놀던 그 추억을 앗아가 버렸구나. 무심한 세월아.'

내 청춘의 짝사랑 무학여고 다니던 순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구원의 여인 소냐의 사랑도 청춘의 나에게 설렘이었다. 지금은 나이 들어 그 열정은 사그라들었지만 그 연정은 품을 수 있다. 기력이 쇠하는 것이지 마음의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일흔 다섯의 나에게도 아직 뜨거운 피가 흐른다. '옥천의 맥가이버' 그 이름이 퇴색되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마음 깊은 곳의 부채의식이 식지 않도록 살아야한다. 내가 가볍게 살지 않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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