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옥 (시인, 옥천군문화관광해설사)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이 지났다. 언제부터인가 11월은 마음에 공복을 느끼는 달이 되었다. 잎이 진 나무들도 수척해지고 그 위에 걸린 까치둥지도 허전하다. 햇볕조차도 야위어 몸 밖의 추위가 몸 안을 기웃댄다. 

산 능선 자락은 절반을 벗은 채 겨우 골짜기만 간신히 가리고 있다. 산자락이 꼬리 잡힌 불길에 늙은 가을이 삭은 침묵만 내려놓고, 단풍나무 잎 새마다 촘촘한 주름처럼 허연 분이 꼬들꼬들해진 생각을 매단 허공도 낡아간다. 

거리에는 아직 제 갈 길을 찾지 못한 낙엽들이 찬바람에 이리저리로 방황을 하고, 11월의 서늘한 세찬 바람 소리가 친구의 웃음소리로 들려온다. 하늘과 땅 사이가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오 년 전 가을이 주홍 비단 수만 필을 풀어놓은 듯 회한의 노을이 벌겋던 그 가을, 그녀는 몇 달째 소식이 없었다. 나는 소식을 알고 싶어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아도 속 시원한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을 계속해서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 결과 걸려온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간신히 들릴 듯 말 듯 힘없이 "괜찮아. 나 잘 있어. 고마워." 그 말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줄이야.   

11월의 끝자락. 낙엽 두어 잎 떨 군 잎 매달려고 애쓰던 날. 산 밑 봇도랑가 줄지어선 단풍나무들이 파란 손 뒤집어 하얗게 악수를 청하고, 헐거워져 헛도는 삶의 바퀴를 대물려 조이던 날. 

생을 반납했다는 그녀. 기우뚱대며 닫는 마지막 생의 문짝마다 단풍잎 환한 길, 그 길들이 열어가는 슬픔을 아슴아슴 밟고 가면 산 중턱이 손 내밀어 마지 할까. 이제 갓 군에 입대해 신병 훈련을 마친 상주는 어리둥절한 야윈 얼굴로 봇도랑을 건너지 못하고 울음만 산처럼 퍼질러 놓았다. 마지막 생을 앞두고 앓고 있던 끈질긴 병마에게 온몸을 내어 주고, 온몸이 부풀어 오른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알리지 말라고 했다던 그녀. 

그의 생애에 앞자락에 박힌 금단추 같은 저 아들과 바라보기에도 아까운 보석 알처럼 고운 두 딸을 두고 어떻게 길을 떠났을까. 같이 따라나선 찬바람마저도 오열을 토해내고 질긴 울음 끝에 막 떨어진 낙엽들이 바닥만 긁고 있는 늦가을. 

"친구야. 그래 우리 이제 지킬 약속이 없어졌구나."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잡았던 손 놓아 너를 멀리 보낸다. 유달리 정이 많고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열정적인 삶으로 너는 우리에게 희망의 겨울이었다. 너와 이별한 11월이 눈물로만 얼룩지지 않기 위해 많이 보고 싶은 날엔 하늘을 올려다보리라. 울지 마라. 잊히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세월 따라 부는 바람이며 따뜻한 햇볕이며 빛나는 별이 될 것이다. 잘 가렴. 겨울에도 자라나는 보리밭처럼 너는 언제나 청춘의 모습으로 기억되어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폐암을 앓고 있던 친구. 모든 취업생의 로망인 부러움을 샀던 좋은 직장을 다녔었다. 그녀는 공기업에 다니는 미래를 촉망받는 청년과 결혼을 했다. 1남 2녀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우선으로 생각했던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 시절, 누구나 먹고살기 바빴던 그 시절, 좀 더 질 좋은 삶에 환경을 위해 바빴던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에 갈망했다던 그녀. 자식들에게만은 충분한 사랑으로 제대로 키우고 싶었다던, 뒷이야기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성공한 인생보다 행복한 인생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그녀는 스스로를 태우고 달구며 주위에도 밝혀 주웠으리라. 

올가을 단풍은 유난히도 색깔이 곱게 물이 들었다. 그 가을도 이처럼 곱던 단풍잎을 떠올리며 친구와 함께했던 지난 젊은 시절, 화사했던 봄꽃을 생각했다. 꽃 진 자리에 영글었던 열매도 생각해 본다. 

대자연 앞에서 사람도, 꽃도, 잎도, 열매도 다 내어주고 서걱거리는 마른 살, 주름이 초겨울 햇살에 그리움처럼 번진다. 비틀리고 늘어진 가지에 걸린 전구 촉 같은 주황빛 감이 축 늘어져 서릿발로 박힌다. 해마다 11월이면 생각나는 그 친구, 이별의 슬픔보다 오래가는 그리움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해가 더해갈수록 그리움의 공복감은 갈증으로 더 해만 간다.

오후가 되자 세찬바람이 떨어진 낙엽을 흩고 지나갔다. 굴러가는 낙엽소리가 그녀의 웃음소리로 번져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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