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교육을 벗어버리고 현장의 문제를 고민하고 대안을 실천하는 지역교육을 만들어보자

 2000년 5월20일 '충북도립 옥천전문대학' 교명을 충북과학대로 변경했다.  옥천도립대학이라고 줄여부르던 이름에 ‘옥천’자를 아예 떼어버린 것이다. 명분은 '해남 옥천이나 천안 목천의 지역명과 혼동을 불러 일으킨다’, ‘청주, 청원 학생들이 오지 않는다’ 등 구차했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생긴 대학에 ‘옥천’자를 떼어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여전히 경남의 도립대학이 ‘경남도립 남해대학’, ‘경남도립 거창대학’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2017년 3월1일부터 옥천상고가 충북산업과학고로 교명을 변경했다. 학과 변경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역시나 ‘옥천’자를 지워버렸다. 영동과 고흥, 서귀포 산업과학고는 왜 지역 명을 고수했던 것일까. 

 왜 우리는 이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일까. 지역에 있는 학교에 지역명을 지운다는 것은 정체성과 자존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을이 학교다’, ‘지역이 학교다’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대안 교육의 레토릭처럼 회자되지만 그 뿐이다. 지역은 양념처럼 액세서리처럼 박제된 교육을 포장하는 재료로만 쓰일 뿐이지, 중심은 아니다. 현장과 괴리된 교육, 실천을 저해하는 교육이라는 것은 사돈에 팔촌도 안다. 교육의 목적이 오로지 서울의 유명대학 보내기 위함이라는 것은 선생도 부모도, 학생도, 학교도 일체가 된다. 

 이런 의식 속에 지역에 청소년이 없다. 청년이 없다고 한탄하는 말들은 사실 씨앗도 먹힐 것 같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말들이다. 여전히 성적장학금이 횡행하고 인 서울 유명대학에 가는 학생들의 장학금 비율이 높은 것을 보면 이는 지역을 떠나는 청소년들에게 돈을 더 쥐어주는 꼴이니 이게 과연 바람직한가 진정으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빛내서 지역을 알린다고. 그런 허망한 허상에 기대어 유명인물이 나오면 생가를 보존하고 관광지를 만들려는 그런 속셈들은 얼마나 저열한가. 기껏해야 그들은 국회의원이나 군수 한자리 하려고 지역에 내려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키워서 다시 지역에 돌아온 사례가 있었는가. 지역에 남아있는 청년들도 먹고 살 것도 없는 지역에서 뭐하냐고 발로 뻥 차버리며 도시로 내몰리는 마당에 지역에 청년이 정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실 도둑놈 심보 아니던가. 

 커다란 흐름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고 청년 정책을 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가 명확하다. 내 자식은 서울로 보낼 터이니 넘의 자식은 여기 남아라 하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흐름은 명분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 사실 할말은 없다.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의 박제된 교육에 환멸을 느낀다. 두발규제, 휴대폰 수거, 화장, 액세서리 규제, 엘리베이터 사용 규제, 학생들 교무실, 교장실 청소를 시키는 등 반인권적인 학교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늘이 주어진 천부인권 조차 교문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가르치는 배움은 도대체 무엇이며, 교육은 어떤 함의를 가질 것인가. 

 아직도 여전히 농업, 농촌, 지역과 관련한 교육은 일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의 삶터에 대해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배움과 교육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교육은 공부는 현재 내 삶에 대한 실존의 문제를, 농촌의 현실을, 지역에 대한 대안을 실시간으로 현재의 공간에서 깊이 사유하는 거라 생각한다. 현장의 문제를 내 삶의 고민을 일도 해결하지 못한채 이뤄지는 공부란 대체 무엇일까. 모순된 교육현장에서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한 탁상교육을 한다면 이는 계속 대물림되며 악순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말 현장 실천형 옥천 대학이 생기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충북도립대가 이런 역할을 맡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다. 이젠 글로벌한 인재보다 지역형 인재를 제발 만들어달라. 쭈그렁 밤탱이가 되어버린 옥천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수많은 지역 인재들을 양성해달라. 충북도립대 뿐 아니라 옥천의 모든 학교에 이를 주문하고 싶다. 그래서 옥천대학, 옥천학교를 꿈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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