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가수된 후에도 옥천 내려가 곡 쓰곤 했다"
"김현식, 가수된 후에도 옥천 내려가 곡 쓰곤 했다"
  • 박해윤
  • 승인 2019.11.18 15: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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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 있는 옥천서 살고싶다는 김현식, 죽향초 입학시켜'
'김현식 외할어버지는 와세다대학 출신 영문학자, 기독교 신앙지 '성서조선' 발간하기도'
'김현식 외가, 구읍 99칸 한옥집 살며 갈포공장·학교 운영해'
가수 김현식의 어머니, 류진희씨와의 전화인터뷰
김현식의 외할아버지 류석동은 무교회주의를 제창하며 신앙 운동을 펼친 김교신과 함석헌, 양인성, 정상훈, 송두용 등과 함께 기독교 신앙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해당 사진은 1927년 2월 창간 동인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앞줄 제일 왼쪽이 류석동씨다.

[옥천인물발굴] 가수 김현식은 1965년 9월 서울에서 전학을 와 1968년 9월까지 죽향초등학교에 다녔다. 약 4년간 옥천에 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수차례 회고록과 인터뷰를 통해 옥천을 '마음의 고향'이라 이야기했다.

그간 옥천신문은 '옥천인물발굴'이라는 연재 기획보도를 통해 김현식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과 그의 외가가 운영했다고 알려진 갈포공장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지난 8월29일을 기점으로 총 4회에 걸쳐 진행된 죽향초 제59회 동문회 인터뷰와 김현식의 외가를 기억하던 구읍 주민을 인터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난 4일 마침내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 중인 김현식의 어머니 류진희(85)씨와 연락이 닿았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난 후 가족들과 캐나다 이민을 떠나 살고 있는 그는 김현식에게 옥천은 '마음의 고향'을 넘어서 음악적 영감을 가져다준 곳이라 이야기했다.

이번 '옥천 인물 발굴 김현식편'에서는 류진희씨의 인터뷰를 통해 김현식과 옥천의 연관성과 문화류씨(文化柳氏)로 군북면 추동(추소리)에서 집성촌이었던 그의 외가를 조명한다.

1968년 옥천읍 옥각리로 봄소풍을 떠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첫째 줄 제일 오른쪽에 자리잡은 사람이 가수 김현식이다.(사진제공: 선옥희)

■김현식, 외할아버지·할머니 살던 옥천으로 내려가다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난 가수 김현식은 1965년 9월,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죽향초등학교로 전학 왔다. 김현식이 옥천에 머무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옥천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식은 유독 시골을 좋아했다. 특히 외가가 있는 옥천에 대한 애정은 더 컸다. 김현식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꽤 있었다. 어느 날 외가로 내려간다기에 놀릴 수는 없어 죽향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래서 옥천에 머물게 됐다.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친척들이 다 거기에 있었으니까 내려가게 된 것이다."

당시 류진희씨와 김현식의 아버지는 서울과 옥천을 왔다 갔다 했다. 김현식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을 했기 때문에 옥천에서 완전히 정착해서 산 것은 아니다.

"현식이가 죽향국민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주로 서울에서 왔다 갔다 했다. 나는 주부였고, 김현식의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현식이 아버지는 옥천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갈포공장 공장장으로, 우리 아버지를 돕기도 했다. 현식이 아버지가 외아들이다 보니 외가와 교류가 많았다. 나는 잘 아는 영화배우나 미스코리아 친구들을 데리고 옥천에 자주 놀러 갔다. 어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외갓집 사촌들도 다 옥천에 있어서 왕래가 잦았다."

지난 보도를 통해 확인됐듯이, 그의 외할아버지는 류석동씨로 군북면 추동(추소리)이 집성촌이 '문화류씨' 성을 가졌다. 또 그의 외할머니는 육상순씨로 '옥천 육씨'로 알려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옥천에서 태어나서 쭉 살았다. 우리 어머니네가 옥천에서 큰 유지였다. 당시 할아버지께서 옥천에서 크게 어물을 취급했다고 들었다. 결혼 전 아버지는 서울에서 일하면서 외국을 오며 가며 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옥천에서 혼례를 올렸고, 이후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성서조선의 표지.

■기독교 신앙지 '성서조선' 창간했던 류석동씨 

류석동씨는 당시 보기 드문 재원이였다. 그간 류석동씨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영문학과를 나왔다고 알려졌지만 류진희씨에 따르면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 옛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버지는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이화여대 등에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옛날 흔적을 보면, 함석헌씨와는 친구였다."

류석동씨는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류진희씨의 말과 몇몇 역사 기록을 토대로 류석동씨가 1927년 7월 '성서조선'이라는 기독교 신앙지의 창간 멤버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한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무교회주의를 제창하며 신앙 운동을 펼친 김교신과 함석헌, 양인성, 정상훈, 송두용 등이다. 이들은 우치무라 간조(무교회주의 창도자)의 한국인 제자로 알려졌다.

이들은 일본유학 시절,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동인지 형식의 '성서조선'을 창간한 것.

성서조선은 무교회주의(교회의 모든 외적 형식, 다시말해 교회당, 의식, 전례, 신조 등은 거부하는 신학적 입장)를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주류였던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와는 반대돼 제도권 기독교계와 끊임없이 갈등했다.

특히 김교신이 성서조선 1942년 3월에 기고한 '조와'(개구리를 조문하는글)로 인해 성서조선 정기독자 전원과 김교신, 함석헌 등 13인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해당 호에서 김교신은 얼어 죽은 개구리들 사이에서 끝내 살아남은 두세 마리의 개구리를 보고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표현했는데 일제는 이를 '희망을 노래했다'라는 이유를 들어 전원 체포하게 된다. 

"연구회 소속이었던 우리 아버지도 교도소에서 가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는 분이라서 운동하시는 분들을 뒤에서 자금을 대면서 조력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 그 옛날에 여운형씨나 이승만 집권시절에는 조병옥씨 등 독립운동가들과 친밀했다. 정말 옛날 역사 속 얘기다."

가수 김현식의 어머니 류진희씨. (사진제공: 류진희씨)

■99칸 한옥집과 갈포공장

당시 김현식의 외가는 구읍의 99칸 한옥집에서 살며,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옥천 유지로 자라났던 어머니 육상순씨 집안의 영향이 컸다.

"아무래도 외갓집이 여기에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다 연관이 돼서 한옥집도 사고, 갈포공장도 운영하게 됐다. 옥천읍내에 99칸짜리 한옥 집이 있는데 정말 유명했다. 아마 99칸 짜리는 그 집밖에 없을 것이다. 집이 엄청 넓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육영수 여사네 집이었다"

김현식의 외가는 당시 구읍사거리(현재 마당넓은집이 있는 위치) 부지를 매입해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해당 부지가 워낙 넓다 보니 안채에는 집이, 마당 터에는 갈포공장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읍내에 있는 방 99칸짜리 집을 김기태씨라고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 집을 사게 됐다. 워낙 터가 넓었기 때문에 여기에 갈포공장도 짓고 학교 못다니는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대문에 거쳐 또 대문이 있는 집 구조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뒤쪽으로는 갈포공장이 있었다. 한 편에는 학교도 있었다."

갈포공장은 류석동씨와 류진희씨의 오빠인 류신일씨가 함께 운영했다. 

"우리 집은 5형제였다. 제 위로 오빠와 언니가 2명씩 있었다. 내가 막내였다. 류신일 오빠는 아버지를 따라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오빠도 완전히 옥천에 와서 산 것은 아니고 따로 하는 사업들이 있어서 서울에서 왔다갔다 했다. 아무래도 공장장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중에는 일본에 수출한다고 해서 일본에 가 있던 적도 있었다."

류신일씨 역시 본래 교육자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실 아버지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사업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오빠는 현재 연세대학교 김동길 명예교수(연세대학교 영문학 학사)와 동기였다."

갈포공장은 김현식이 옥천을 떠난 1968년을 기점으로 조금더 운영됐다. 이후 다른이가 갈포공장을 인수했다.

"갈포공장을 언제 접었는지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현식이 서울로 전학 가고 나서 조금 운영하다가 다른이에게 판 기억이 있다."

금거북이길에 조성된 김현식 벽화 사진. 기획은 고래실이, 작업은 카페 '토닥'을 운영하고 있는 이종효 마을교사가 그렸다. (사진제공: 고래실)

■성인된 김현식, 곡 쓰러 옥천 자주 내려갔다

죽향초등학교에 다닐 당시 김현식은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다. 음악적 재능을 몰랐던 가족들이였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죽향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 그때인 것 같다. 당시 어른들이 나가는 음악회가 있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송해씨가 사회 보는 노래자랑 프로그램 같은 거다. 옥천에도 그런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현식이가 집에는 얘기를 안 하고 거기를 나가서 노래를 해가지고 상을 탔다. 어른들이 노래하는 행사였는데 애가 나가서 상을 타니 당시 화제가 됐다."

옥천은 김현식의 마음의 고향인 동시에 음악적 영감을 제공한 곳이었다. 성인이 된 그는 옥천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김현식은 가수가 된 다음에도 곡을 쓸 때 옥천에 내려가곤 했다. 신문에서 옥천 얘기가 난 게 다 이 때문이다. 어려서 옥천에서 살았던 것이 자기 추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독 옥천 얘기도 많이 했다."

옥천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 '올 게 왔나보다' 했다. 가수 김현식의 인생에 있어 옥천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야 지금은 많이 흘렀지만, 현식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옥천 얘기가 정말 많이 나왔다. 옥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녔기도 했고 음악적인 영감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서다."

캐나다 토론토라는 타국에 있지만, 한국에서 진행되는 김현식과 관련한 다양한 추모 사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있다.

"최근 서대문구에서 김현식 동상을 세웠고, 골목길 조성 사업도 진행한다고 들었다. 나야 뭐 솔직히 얘기해서 고마운 얘기다. 김현식 말고도 대한민국에서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은 많지 않느냐. 그래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현식이를 기리고 주변에서 많이 생각해주는 것 자체가 정말 고맙다."

김현식과 옥천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에 김현식을 기리기 위한 사업을 한다면 흔쾌히 응할 것이다.

"김현식의 생전 모습과 보도 내용들이 틀리게 나올 때면 속상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이 세상이 사람에 대해 올바른 얘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김현식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좋은 의도에 대해 내가 굳이 반대를 할 이유는 없다. 현식이의 마음의 고향인 옥천에서 김현식을 찾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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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9-11-19 15:38:40
와~! 흥미진진하네요. 김현식과 옥천의 인연이 나름 깊었군요... 그나저나 문화류씨에 군북면 추소리 집성촌이면... 류승규 선생과도 인연이 있는 건가요? 신기합니다. 기사 재밌게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