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서 구조대원,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기를 꿈꿉니다’

스물여섯의 정찬씨,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처음에는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충남 천안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대 경찰학과에 입학했지만 수업을 따라가기 버거워 방황하다 곧장 군 입대를 결정했다. 제대 후에는 ‘돈 벌어야겠다’ 생각이 들어 휴대폰 강화필름 제작 공장, 철공소, 통신사 중계기 설치 업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일은 대부분 일 년을 넘기기 어려웠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로 절반의 임금을 받고, 하대를 당하고, 밤새 일하면서 초과수당은 생각지 못하는 상황들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버티고 일하는 사람들이 대단해보였고, 한편으로는 ‘공부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할 걸. 이제 어떡하면 좋지’ 후회했다. 

어떻게 보면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물어보면 물어보는 대로 더듬더듬 대답한다. 꾸미는 말이 없이 솔직하고 성실하게 대답한다. 문득 “지금 하는 이야기 정말 다 기사에 써도 돼요?” 물으니 “저는 괜찮아요”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정찬씨는 ‘나같은 사람 이야기도 쓸 만한 게 있는지’ 물었다. 정찬씨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당당하고 잘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잘하지 못한 게 많고 부끄러운 일이 많다. 그렇지만 숨기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부끄러웠던 만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꾸 되묻는 질문에도 다시 생각해보고, 진지하게 대답해줬다. 그를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일 충북도립대학교에서 이정찬 학생을 만났다. 사진은 소방행정과 실습실에서 촬영.

[도립대 사람들] 스무살, 대학에 입학했지만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 워 겉돌았다. “실업계에서는 오후 두시 세시면 학교 끝나고 다 놀러 나갔었는데요.” 쑥스럽다는 듯 웃는다. 그간 착실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다른 동기들을 자신이 따라잡기는 어려워보였다. 특채로 은행권에 취업한 몇몇 친구들이 돈을 잘 벌고 있는 게 보였다. 조바심이 났다. ‘나라고 못할 건 없지’, 군 제대 후 학교를 자퇴하고 일을 시작했다. 막상 일은 만만치 않았다.

“철공소에서 일할 때요. 그라인더 소리에 귀가 찢어질 거 같더라고요. 몸은 땀범벅이 되고, 이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아버지가 고생하는 게 생각났어요. 아버지가 원래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낙선하고 나서 빚을 많이 졌거든요. 돈이 급하니 노가다도 하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내가 잘해야 하는데... 계속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돈이 좋아서 조바심이 났던 게 아니다. 아들 셋 있는 집안에 정찬씨가 장남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무엇이 됐든 제대로 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고, 실제로 돈은 중요했다. 그렇지만 해야 하는 일과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스무살 초반 정찬씨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자주 났다. ‘아이씨, 열심히 하자’ 생각했다. 쇳가루가 분진이 되어 날리면 시야가 흐려졌다. 5년 가까이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했다. 

지난해 추석 즈음이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를 그만뒀을 때였다. 동생이 정찬씨에게 “형, 전문대 진학해볼 생각 없어?” 말했다. 왜, 요새 정부가 소방공무원 많이 뽑는다고 하잖아, 근데 소방행정과가 개설된 전문대가 있더라고, 거기 내신 반영 비율이 높고 형 학교 성적 나쁘지 않았으니까 다시 시작해보자, 그런 이야기였는데 정찬씨는 ‘이제 와서?’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해 군대 후임이 정찬씨를 찾아왔다. 다섯 번의 시험 끝에 경찰 시험에 합격했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나도 했는데 형이 왜 못해?”
 
“그런데 여기 소방행정과에 정말 붙었어요. 얼떨떨했어요. 정말 공부를 다시 하게 됐구나...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 밤마다 유튜브를 봤거든요. 몸으로 하는 일이니 자신 있다 싶다가도, 세상에 수많은 직업 중에서도 소방관이 우울증에 잘 걸리는 직군이라고 하더라고요. 일하는 중에 내가 다칠 수도 있고 또 동료가 다치는 모습도 자주 보고.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됐어요.”

옥천소방서 대응구조구급과 박병호 소방경의 이야기를 들은 게 그 즈음이다. 박병호 소방경이 직접 도립대 소방행정과에 출강을 나왔을 때다.

“교수님이 구조대였을 때 산에서 특전사들이 사고를 당해서 구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사실 이미 잘못 됐을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찾아야 한다, 산을 헤매고 헤매다 결국 업고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특전사 가족 분들이 정말 감사하다고 손을 잡고 울었다고요.”

98년 4월 영동 민주지산, 제5공수특전여단이 기상이변에도 행군을 강행하다 특전사 6명이 동사한 사건이었다.

정말 어려워도 꼭 필요한 직업이구나. 그때 생각했다. 공장에서 일할 때 꼭 자신이 부품 한 조각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일이구나, 사람을 살리는 일이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말 특별하고 중요한 일이구나, 생각했다.

오전 일곱 시쯤 일어나 못해도 오후 열 시까지, 늦게까지 하면 오전 한 시까지도 ‘명륜재’에 앉아 있는다. 명륜재는 학교 공무원 준비반이자 독서실이다. 밥은 보통 학교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으로 간단히 먹기 때문에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니를 통 틀어도 한 시간이 안 걸린다.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교 근로 시간을 제외하고 열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물론 ‘순공부’ 시간이 열두 시간이라는 말이 아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책상 앞에 가서 앉아 있는다는 거다. 그렇게 없던 습관부터 만들어가고 있다.

“당장 목표요? 졸업할 때 저희 과 수석으로 졸업하는 거요. 저희가 소방행정과 1회 졸업생이잖아요. 욕심 내보고 싶어요. 그런데 되려나 모르겠어요. 다른 과목은 몰라도 소방공학수학이 있는데 거기 적분이 나오거든요. 제가 적분을 해본 적이 없어서 수학이 꼴찌예요(웃음)... 아, 말하고 나니 어려운 목표인 거 같긴 해요. 그래도 노력해봐야죠.”

바깥을 보니 벌써 오후 6시가 넘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두 시간 넘게 이야기했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인터뷰가 길어졌다. ‘오늘도 명륜재 갈 거예요?’ 물었다. ‘당연하죠’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은 오전 한 시까지는 할 거 같다고, 이렇게 인터뷰도 했는데 뭐라도 해야 할 거 같다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정찬씨가 웃었다.

저녁식사 시간, 명륜재에 학생들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정찬씨 자리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막상 사진을 찍으려니 어떻게 해야 하나, 쑥스럽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웃기 시작한 모습.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고 있는 교재. 공부한 흔적이 색깔별로 빽빽하다. 책상 한 켠에는 다 쓴 모나미 볼펜 대여섯 자루가 놓여 있었다.
충북도립대 공무원 준비반이자 독서실인 명륜재 모습. 모두 42개 좌석이 있다.
"오늘도 명륜재에서 공부하다 갈 거예요?" "당연하죠. 이렇게 인터뷰도 했는데, 더 열심히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마주보고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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