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난로 들어앉힌 훈훈한 겨울채비

 

■ 나란히 앉은 장작더미와 화목난로, 겨울 준비를 마쳤다. 
밖은 뭇 서리 내리고 으슬으슬 추워도 겨울 잠자리 걱정이 없다. 아들이 미리 와서 장작을 차곡차곡 쟁여놓고 갔다. 문 앞에 장작더미만 봐도 겨울 준비를 다 마친 거 같다. 이젠 김치도 사먹는 시대라 김장 걱정도 없다. 지수리는 둥시 감나무가 많아 늦가을이면 집집마다 주렁주렁 달린 곶감이 진풍경이다. 그 맛을 아니 보기만 해도 입맛을 다신다. 곶감이 우리 네 노년 같다. 수분이 빠진 쪼글쪼글 감처럼 주름은 있어도 그래도 지금이 인생의 맛을 아는 때다. 화목난로 옆 소파에 앉아 윗집 동생을 기다린다. 
한낮의 햇살이 창가에 부서지고 어느새 졸음은 나를 어린 시절 내 고향 동이면 동막길 갈마우 나루터로 데려간다. 어머니가 도망가자며 내 손을 꽉 잡았다. 아마도 까마득한 기억, 6. 25! 피난을 가느라 마을 뒷산으로 도망가는지 나도 어머니도 잰 걸음이다. 우린 5남매로 성장했고 나도 5남매를 두었다. 내 고향 동이면은 강가 마을이라 배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교통이 불편해서 다들 떠나오고 이제 집한 채 남았다는 소식만 들었다. 그 시절 우리 어릴 때는 배에 대여섯 명씩 바짝 붙어 앉아 강을 거슬러 옥천에 나오곤 했다. 아마도 배바우 어딘가에서 배가 닿았던 것 같다. 

■ 무시무시한 얘기하나 해줄까? 스무 살인가 동이면 살 때 말이야 개우지한테 물어뜯길 뻔 했어..
강가에는 개우지라는 개처럼 생긴 짐승이 있었어. 물가나 숲속에 살았는데 지금은 먹을거리가 없어 그 짐승도 씨가 말랐을 거야. 시집오기 전 캄캄한 밤 마실 다녀올 때 내 뒤를 따르는 발자국 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들었거든. 무서워서 뒤 돌아 볼 수도 없고 그렁그렁 짐승 숨소리가 들릴 듯 말듯 하는데 딱 개우지여. 내가 빨리 걸으면 빨리 따라오고 걸음을 늦추면 개우지도 천천히 따라오는데 아후 얼마나 무서웠는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내 팔이며 다리를 물어뜯을 거 같은 거야.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친구 집으로 냅다 달렸지. 그때 생각하면 소름이 쫙 끼쳐. 친구 집에 가서도 한참을 덜덜 떨었는데 몸이 땀으로 다 젖었더라구. 다 옛날 얘기지. 지금은 개우지 산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이젠 멧돼지가 애물단지가 됐지 

■ 23살에 결혼하고 나이 들어 시어머니 남편 병수발을 12년이나 했지뭐야
중매쟁이가 남편을 소개해서 두어 번 만나고 결혼했는데 부모님은 반대를 하셨어. 부모님 몰래 중매를 했으니 당연히 안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운명은 그렇지 않았지. 부모님은 그저 내가 고생할까봐 그렇게 반대를 하셨던 것이야. 시댁이 너무 못 산다고 막으셨는데 중매쟁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혼사를 성사시키려고 애를 썼지. 아니나 다를까 시집가서도 고생을 참 많이도 했어. 그때 고생안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살림살이도 쓸 만한 게 하나도 없었고 남편은 그 어렵다는 담배농사를 짓자고 했지. 그러니 별수 있나 하자면 해야지 열심히 일했어. 담배 농사라는 것이 그래.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건 담배 농사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야. 그것으로 자식들 공부 가르치고 키웠지만 고생한 것에 비하면 별 재미는 없는 일이었어. 다행히 아이들 다섯이 모두 착하고 성실해서 1년 담배 농사가 끝나면 대공을 뽑는 일도 아이들이 도와주어 한결 수월했어. 지금 이렇게 방안에 화목난로까지 놔주고 트럭으로 장작도 사오고 올 때마다 장작도 패주는 아들들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심성 좋은 며느리가 들어와 자주 전화하는 것은 물론 때마다 찾아와 먹을 것도 해서 먹고 심심하지 않게 해 주니 그것도 내 복이여. 
지금까지 열 번도 넘는 이사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태평성대야. 이웃들은 내가 관절이 안 좋다고 닭발을 수시로 사와서 같이 요리해서 먹어. 지금도 큰솥에 하나 가득 담가 놓고 저녁에 요리해서 동네잔치를 할 판이여. 옥천에서 딸 같은 복지사 선생이 와서 아픈 다리에 정성스럽게 파스도 발라주고 커피도 타 주고 말동무도 해 주니 아침부터 심심할일도 없지. 대접 받는 다는 생각을 하면 고단했던 지난 세월도 서글프지 않아. 
시어머님이 풍으로 쓰러지셔서 5년 동안 병수발을 했어. 지금 같으면 요양 병원 도움도 받겠지만 그때는 온전히 집에서 다 감당해야했지. 참 길고 긴 시간이었어. 누워 계시면서도 치매까지 와서 가끔씩 정신 차린 말씀을 하시며 

”네가 고생이 많다. 미안하다.“
그 말씀에 온갖 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편찮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정말  서럽고 고단했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었어. 그렇게 서럽게 나를 시집살이 시킨 시어머니라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상여를 타고 잔다리 골짜기에 영원한 둥지를 마련하셨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정을 떼려는지 까무룩 정신을 잃으시면서 
“내가 죽으면 네 머리채 잡아 비틀거야.”
하셨는데 정말 돌아가시고 나서 그 무서운 마음이 오래가서 해 떨어지면 된장 푸러 장독대도 못 갔어. 마루에 곰방대 물고 앉아계시는 환상에 다리가 후들 거리는 건 예사였어. 어머니를 잔다리 골짜기에 묻고 오면서 하염없이 울었는데 아마도 내 설움으로 울었겠지..
남편도 후두암이 걸려 또 7년이나 병수발을 해야 했어. 남편도 무뚝뚝하니 미운털이 박혔어도 어쩌랴 남편인데 7년을 한결같이 지극히 모셨어. 아마도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담배 농사를 지어서 그런가 나 혼자 생각해봤어. 남편도 참 고생 많이 했지. 우리 가족이 회인에 살 때는 석탄을 캐는 일을 했어. 깊은 갱에 들어가 가족들을 위해 석탄을 캐고 얼굴이며 손이며 온 몸이 숯 검댕이가 돼서 돌아올 때면 살갑지 않은 남편이지만 참 안쓰러웠어. 그러나 어째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기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남편은 일만 하다가 병으로 고생하고 67세에 돌아가셨어. 시어머니 5년, 남편 병수발 7년 들고나니 나도 진이 다 빠졌어. 

■ 회상
큰 장작을 하나 난로에 집어넣었다. 활활 타오르며 금세 온 방을 덥힌다. 그렇게 난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을 섬기며 자식들을 낳아 키우면서 나를 태웠다. 우리나이면 다들 속이 다 타서 숯 검댕이 같다고들 한다. 그래도 우리가 있어서 가정을 지키고 난로처럼 주변을 따뜻하게 한 것이다. 지금은 여기 저기 아픈 몸으로 불편한 곳이 많지만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었다. 오늘도 동네 사람들 하나둘 모여 믹스커피를 한 잔씩 타서 앞에 놓고 자식 자랑도 하고 맛난 간식도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참고 참으면 좋은 일을 볼 것이라고 했다. 화목난로의 옆자리에 앉아 솔솔 낮잠이 찾아오면 어린 시절로 나를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 혹시 알아? 개우지한테 쫓겨서 도망갔던 친구 집 바로 순이 네로 나를 데려갈지. 생각만으로도 봄처럼 따뜻한 겨울이다. 잠시 한낮의 졸음을 만나러 가야겠다. 

박승자 작가
박승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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