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 문향의 향연

창가에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몸은 이곳저곳이 콕콕 쑤셔대고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있는가 보다. 선뜻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냉수 한 컵으로 몸을 추슬렀다. 끄물끄물한 날씨 때문인가 이런 날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휴일이라서 아파트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했고 반면 거리는 한산해 보였다. 딱딱한 콘크리트 속에 갇혀 있는 답답함에 고향이기도 한 금산 쪽으로 차를 몰았다.

고향 어귀에 들어서자 떨어져 있는 감꽃들이 향기를 머금은 채 나를 반겨 준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감꽃 목걸이를 만들던 기억이 났다. 차를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 흩어져 있는 감꽃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한 개씩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목걸이를 걸고 누구 목걸이가 제일 길고 예쁜지 자랑하다가 흐트러져 버린 목걸이 때문에 속이 상해 친구와 싸우기도 했었다. 귀한 보석으로 만든 값비싼 목걸이는 아니지만 꽃 목걸이를 걸어주면서 수줍게 웃던 동네 오빠도 생각났다. 그때는 꽃 목걸이에 담긴 풋풋하고 싱그러운 풋사랑의 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꽃잎 하나하나에 떠오르는 추억들……. 감꽃이 핀 자리에는 다시 감이 열리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황금빛으로 제 몸의 색을 만들며 익어갈 것이다. 밤새 비바람이 불고 난 뒤의 이른 아침 소쿠리를 들고 밭에 나가면 파란 땡감이 떨어져 있었다. 약간 덜 익은 감들도 돌멩이 위에 떨어져 속살이 다 터져 나와 있었다. 온전한 감들을 풀섶에서 찾아 차근차근 소쿠리 가득 주워오면 식구들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가지 위에 달린 감들은 점점 붉은 빛을 띠면서 익어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뒤뜰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홍시를 따서 내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러면 나는 아낌없이 주는 엄마의 사랑에 행복했었다. 하지만 허기진 배를 감으로 채웠던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실 온 이웃 분들과도 같이 나누어 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들었던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내가 살던 집은 온데간데 없고 잡초만 우거졌으며 장독대가 있던 곳에는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감나무만 거목이 되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아직 감꽃이 달려 있는 가지도 있고 파란 감이 매달려 있는 가지도 있었다. 흩어져 있는 감꽃들을 주워서 풀잎에 꿰어 걸어본 순간 푸릇한 향기가 코끝으로 감겨들었고 문득 어릴적 동네 오빠가 만들어준 목걸이의 추억이 떠올랐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흩어져 있는 감꽃을 한움큼 주워 바람에 날리면 꽃잎은 나비처럼 춤을 추는 듯했다. 머리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오빠 입에다 넣어주었던 유년의 기억들…….

그런 추억을 되새기며 꽃 목걸이를 목에 건 채 차에 올랐다. 시들어 가는 감꽃이 마치 나이 들어가는 나를 닮은 것 같아 후사경에 비친 얼굴을 만져보았다. 40년 전과 똑같은 목걸이를 걸고 있지만 앳되고 순수했던 모습은 굵은 주름살 곳곳에 묻혀 있었다. 자그마한 감꽃 향기에 용기를 얻어 추억 속의 오빠 작업장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고 군데군데 지저분한 나무 조각만 흩어져 있다. 어릴적 수줍게 웃으며 내 목에 걸어주었던 목걸이를 되돌려 주고 그때 나누었던 그 웃음도 같이 하고 싶었는데…….

허전한 마음을 안고 집에 오면서 감나무의 고마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감나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많은 것을 선물로 주는 자연의 친구였다. 봄이면 연두빛 새 잎으로 희망을 주기도 하고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아름다운 꽃목걸이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여름에는 무성해진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강한 햇빛을 막아 주고 가을에는 맛있는 열매와 함께 단풍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겨울에는 가치밥 몇 알을 달고 모진 눈보라 속에도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꼭 우리 인생살이와 같았다.

이런 고마움을 생각하며 집으로 오니 목에 걸려 있는 감꽃 목걸이가 한잎씩 시들어 가고 있었다. 추억의 오빠와 같이 한 동네서 자랄 때는 감꽃이었다가 파란 땡감일 때 추억을 만들고 노랗게 익어갈 때 고향 떠나와 지금은 홍시감으로 변해가고 있는 나처럼 감꽃은 그렇게 시들어갔다. 하지만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들 때 이러한 추억들로 작은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에게 이런 유년의 기억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삶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난 무척 행복한 여자인 것 같다. 유행가 가사처럼…….

-김정자, 옥천민예총·옥천문학회 문학동인지 제1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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