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민 (연암대, 옥천신문 청소년기자)

나는 청소년 활동가였다. 2018년, 만18세 청소년이었다. 청소년 선거권 보장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대전 으능정이거리. 추웠던 1월, 2월 겨울이었다. 매주 토요일 14시, 사람들 앞에 섰다. 빨갛게 얼은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청소년 권리와 선거권 보장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바쁘게 걸음을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 앞에 가만히 서서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나가며 듣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더 큰 목소리로 연설했다. "현재 학교는 학생들을 배제한 교사중심으로 흘러가는 교사공화국이며,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입시중심입니다.", "청소년 참정권 보장은 단순히 교육감,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닌, 학생과 함께 하는 학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입시중심주의, 대학만능주의를 청소년이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이번 신속처리안건상정으로 올라 간 선거제 개혁안에 선거권 연령하향이 포함되어 있다. 이걸 보며 청소년운동을 했던, 그때가 회상되었다.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때와 지금, 변화한 것이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아직도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 비청소년은 옳은 선택만 하고 청소년은 옳지 않은 선택만 하는 존재로 잘 못 여겨지고 있는가. 청소년의 정당한 권리를 묵살 시키려는 논리가 이 사회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고 있다. 사회는 나이 프레임으로 얼룩져 있다. 나이가 어리면 과소평가 받기 십상이다. 청소년과 청년은 여전히 개울에 비쳐지는 허황된 하늘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다. 흔히 청소년과 청년에게 '미래'라는 단어가 따라 다닌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래가 아니다. 이미 사회에서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임을.

*비청소년 : 청소년 반대되는 단어. 기존 어른이라는 단어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나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일컫는 단어다. 청소년은 무책임하며 나이 중심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는 차별적 단어이다. 청소년과 어른보다는 청소년과 비청소년이라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