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이야, 그 덕에 내 인생이 늦가을 하늘만큼 깊고 푸르지

 

■ 난 뼛속까지 모산 댁
깨끗하고 조용한 부락 모산에서 나고 자라 80년! 난 그야말로 뼛속까지 모산댁이야. 지수리 1구 지내 부락은 원래 ‘못안(지내)’이라 했는데 모산이라 부르게 되었어. 나는 인심이 좋은 모산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역시 모산 태생으로 모산의 멋쟁이 박 한덕씨와 21살 22살 꽃처럼 환하고 녹음방초 우거진 좋은 시절에 서로 만나 사랑하고 가정을 만들었지. 우리가 처녀 총각일 때 우리 부락에는 대략 60가구 가까웠는데 이제는 30호보다 작게 남았어. 내가 결혼할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3쌍이 결혼했는데 그중 2쌍이 우리처럼 신랑 신부가 모산 출생이었어. 서로 빤히 잘 아는 사이로 80년을 살았으니 핏줄만큼 두터운 인연이지.

 

■ 아, 우리 친정아버지 생각하면 야속한 분이지만 세월이 약이야.
친정 이야기부터 해야겠네. 친정아버지는 요즘 말로 하자면 전문 직업인으로 석물을 손으로 깨서 비석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한 달을 깨면 쌀 10가마니 이상을 받았어. 석수장이라고도 불렀지. 아버지 고향은 청정면 소야산 뒤 질마재이고 친엄마는 모산이 고향이야.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대부분 장리쌀(준 곡식에 대하여 그 절반을 가을에 이자로 쳐 받는 변리)로 비싼 이자를 물어가며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는데 친정아버지는 석수 직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어째 아버지 그늘에서 덕 본 것은 솔직히 없었어.
친정엄마는 딸만 넷을 두었는데 언니와 나를 연달아 낳고 그만 아버지에게 소박을 맞았어. 그 옛날은 참으로 여자들에게 기막힌 세상 이었어. 말하면 뭐할까 아들 못 낳는다고 소박맞는 여인네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말이야. 아버지는 아들을 보겠다고 청성 질마재에서 따로 살림을 내었어. 이복 남동생을 보면서 우리 집에도 가끔 드나드셔서 내 밑으로 여동생이 생겼고, 또 작은 엄마에게서 둘째 아들을 보셨지. 이어서 우리 엄마에게서 넷째 딸을 보셨어. 남자들 중심의 세상이 배다른 핏줄만 낳은 것이 아닌 한 많은 여인네들을 또 낳게 되었지 뭐야.
친정아버지는 질마재에서 작은 엄마와 두 아들과 거나하게 잘 사시면서 친정엄마와 딸 넷인 모산 본가에는 쌀 한 말도 팔아주지 않았어. 그토록 아들이 좋으셨는가봐. 우리의 피눈물은 생각을 못하신 건지. 어쩌다 한 번 돈을 주시면 온갖 유세를 다 부리셨어. 개화된 지금 세상이라면 아버지에게 생활비라도 달라거나 엄마에게 이혼이라도 하라고 청원하였을 건데, 그때는 어두운 시절이라 원망할 줄도 몰랐지. 세월이 약이라고 지금 그 슬픔과 원망 서운함 다 잊어버렸지.

 

■ 친엄마는 깡우리(광주리) 장사로 우리를 키워주셨어. 
오남 장에 가서 비누 미역 명태 청태 등등을 떼어다가 인근 동네를 가가호호 다니면서 보리쌀로 바꿔오셨어. 엄마의 노력으로 간신이 입에 풀칠을 했고 둘째 딸인 나는 엄마가 돌아올 때쯤 징벌(진벌) 앞에서 기다렸다가 무거운 깡우리를 내려 받아 대신이고 내 긴 그림자를 터벅터벅 밟으며 집까지 돌아오던 그 시절이 있었네. 산비탈에 둥시 감나무와 마을 앞 늙은 느티나무는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나를 위로해 주는데... 못안 연못은 국사봉을 품고 비탈진 밭에 나물과 곡식들이 바람에 익어갈 때, 나는 갑갑한 내 마음을 창공을 나는 새에게 실어 보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듣고 부르던 노래를 난 아직도 기억이 나.
“귀 있고 못 들으면 귀머거리요, 입 가지고 말 못하면 벙어리라지, 눈 뜨고도 못 보는 글의 소경은, 소경에도 귀머거리 또 벙어리라. 듣는 대신 보란 글을 보도 못하니, 귀머거리 이 아니고 그 무엇이며, 말하듯이 써낸 글을 쓰도 못하니 벙어리가 아니고 그 무엇이요.”
우리말을 못 쓰게 하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글을 읽고 쓰도록 나라가 가르치던 시절이었어. 아마도 이승만대통령 때인데 나도 어렸을 때 무척 글을 배우고 싶었어. 그때 모산에도 공청(지금의 마을회관)에서 야학을 운영했는데 아마 선생님이 똘바우(관영이) 아버지였을 껴. 저녁마다 어른들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쳤는데 나는 자진해서 찾아가서 야학 방에서 어른들 틈에 껴서 한 1년간 다녔지. 한글을 떼고 나서 점심 먹고 가는 진짜 오후학교(오후에 수업 시작. 지금의 안남초등학교)에 1년 다녔어. 내가 공부를 어지간히 했으니까 선생님이 입학하러 오라는 거라. 엄마는 장사하느라 겨를이 없고 해서 나 혼자 찾아가서 아침반으로 4학년으로 등록했지. 아침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5학년 1반으로 1년간 다니다가 그만두고 말아서 졸업장도 못 받은 게 아쉽지만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우산이라도 써야 했으니께, 그리고 눈앞의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길을 찾으면 되겠지 하고 삭였어.

 

■ 세월이 나를 삼킨 거네. 
엄마를 도와 일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뻔히 엄마 혼자 그 고생 다 짊어지라 못하제. 내가 딸이니까. 물론 공부하고 싶었지, 많이 공부해서 멋진 사람이 되어 창공을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온 세상을 두루 보고 싶은 소망을 가슴 깊이 묻었지.  
시집와서 금방 애기가 안 들어서니 시어머니가 밥값 못한다고 눈치 주셨지만, 나는 친정엄마의 한을 풀어주느라 그랬나 사람 팔자 모른다고 아들만 넷을 두었는데 밥을 안 먹어도 든든했어. 밥벌이하려면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공부의 중요성을 진작 깨달은 나는 열심히 아들들 가르쳤지. 다들 잘살아서 안심인데 문제는 내가 쪼매 아파. 허리가 아픈데 삔(철심)을 10개나 박아야 한대서 그냥 뼈 주사나 맞으며 버티고 있지. 다행히 우리나라가 의료보험이 좋아서 2년마다 무료로 하는 건강검진을 옥천 김내과에서 했는데 남편이 74살적에 ‘2기는 넘고 3기는 안 되는’ 대장암을 발견했어. 수술하고 5년 만에 대장암을 제대했는데 김내과가 고맙고 정부가 고맙지 뭐야. 의사가 생선회랑 감이랑 탕약은 평생 먹지 말라고 해서 주의하고 있어. 아침마다 마 갈아서 한잔 드시게 하고 상황버섯 끓여서 물처럼 마시고 있어. 
옛날부터 모산 부녀자들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결혼하고 밭 1천 평 늘이고 논 9마지기 늘린 것도 그 기질이 있는 것 같아. 젊었을 적 우리 부녀회가 술집 대여섯 곳도 없앴고 나물 뜯어 대전역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힘이 되었지. 작년에 대전사는 박 종천씨 아들이 돼지 1마리 보내서 모산마을 잔치하고 진벌마을에도 앞다리 하나 나눠주고 겨우내 같이 먹었어. 젊은 엄마들이 2명씩 짝져서 우리 밥 차려 줘서 고맙기 그지없어. 우리 서로 함께 키워낸 아들이라 감사는 두 배로 늘어나지. 옛날은 배고파서 먹는 게 최고였는데 지금은 친구들과 회관에서 커피 마시고 소곤소곤 얘기 나누며 사는데 뭐 거침이 없어. 늦가을 황금빛 들녘은 추수가 끝나 빈 들판이듯, 같이 80년 세월 보낸 우리 동무들 도란도란 ‘아우님 성님’ 하며 따사로운 겨울 준비 서두르리라. 

이연자 작가
이연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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