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누동리 누동학원에서 만난 아이들
시인과 함께 교사로 일했던 이우인씨 인터뷰(1)

[기획-옥천 인물발굴 윤중호(9)] 이우인(63,대전 중구)씨가 윤중호 시인과 함께 일한 시간은 6개월 정도다. 1980년 신군부 시절 안면도에 있는 재건학교 ‘누동학원’이란 곳에서다. 초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었지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생들도 많았던 때 이우인‧이현숙‧이은재‧김영근‧윤중호 다섯 사람은 누동학원 교사로 80년 8월까지 각각 10개월부터 6개월까지 비슷하게 일했다. 윤중호 시인은 79년 11월 군 제대 후 스물다섯인 80년 3월 복학을 미루고 안면도로 갔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시인이 대학시절까지 선생님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어린시절 ‘바른세상에 대한 눈’을 기르는 것의 중요성을 이후 그의 책에서 종종 이야기하는데 아마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계몽의식이라던가 엘리트의식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어질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는 아이들에게서 그가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29일 대전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우인씨는 윤중호씨를 '참 잡다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학교에서 일하면서도 학생뿐 아니라 마을청년과 어울리고 또 마을사람과 함께 농사를 지었단다. 선생은 중간중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시인에게 애정이 없는 사람처럼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가요?’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챙겨온 가방에는 윤 시인에 관한 자료가 한아름 있었다(선생의 말마따나 ‘집안을 다 엎어서 겨우 찾은’ 자료들이다). 6개월 정도 함께 일한 사람에 대해, 또 당신 60여년에서 10개월 정도 차지할 뿐인 삶에 대한 자료인데 집을 옮기면서도 고이 이고 다니셨다.

이우인씨는 생각이 잘 안 나는 부분은 말끝을 흘리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한심한 누이동생'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웃기도 했는데 그렇게 가끔 웃는 게 정다웠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어질 글에서는 이우인씨의 말과 전해준 자료들을 빌려 시인이 누동학원에서 일했던 때 이야기, 학원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또 다음주 ‘옥천사람들’ 지면을 빌려 당시 시인이 학생들이 쓴 글을 엮어 만든 ‘누동학보(이것도 이우인씨가 챙겨준 자료다)’도 두 페이지에 걸쳐 싣겠다. 농어촌에 살며 성실하게 삶을 꾸려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윤 시인이 있었다면 이 두 페이지도 적다고 말하지 않았을 성싶다. 타박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누동학원 학생들과. 맨 앞줄에 안경 쓴 사람이 전영숙씨. 맨 뒷줄에서 두번째 줄,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학생에 손을 양 손을 올린 사람이 이우인씨다. 학생들 뒤편으로 '누동학원' 글씨가 눈에 띈다. (사진제공: 이우인씨)

■ 안면도에 찾아온 ‘노래 부르는 청년’

“윤중호 선생을 처음 봤을 때 얼굴은 달마도사가 떠올랐고 머리는 비바람에 많이 삭은 원두막 초가지붕이 떠올랐다. 정말 신기한 그 얼굴이 걸핏하면 큭큭거리며 웃으니 정겹기는 또 왜 그리 하염없던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묻고 저 혼자 대답하고 난리여서 모두 배를 움켜잡고 절절매다가 뒤집어졌다.” 전영숙 수필집 ‘다락골 연가’ 중

1975년 안면도 안면읍 누동리. 안면도와 가까운 태안이 고향인 김한택 선생은 뜻이 맞았던 길경렬 선생과 함께, 그리고 공주사대 서퐁세 교수 신부의 도움을 받아 76년 안면도에 학교 부지를 사고 재건학교인 누동학원을 지었다. 전영숙 선생은 1년 뒤인 76년 누동학원 살림을 책임지는 서무주임으로 일을 시작하는데 81년 학원 문을 닫을 때까지 안에서 바깥에서 오가며 학원 재정을 도왔다. 전영숙 선생은 80년 3월 학원을 처음 찾아와 자신을 소개하던 윤 시인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윤 시인이 자기 머리를 두고,

“이이이, 지 머리털이 왜 이 모냥이냐구유우? 지가 말이쥬, 보리방구 시절에 부마사태가 나서 부산꺼정 차출됐슈. 미치것두마안! 헐 수 있남유? 목구멍이 포도청이지 머어. 워치케든 살어남어서 목구멍에 허구, 총각구신도 면해 보구 헐라므는 시키는 대루 히야쥬. 대애충 이리 쫓어댕기구 저리 쫓어댕기구 허매 줘터지기는 또 엄청 터졌쥬. 그때 하두 대갈빼기를 꼴아박어서 이 꼭대기가 아주 훼앵해졌슈…(후략)”

라고 말했단다. 이우인 선생에 따르면 ‘가락하고 춤추고 기타치고 노래 부르고… 하여간 아이들 가르치러 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사람’이었다.

‘유쾌하다’고 말하기는 또 어려운 사람이었다. 79년 YH무역농성 사건 이후 문교부가 교육청에 전국 300개 야학을 모두 폐쇄하라고 지시내리고 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대학 시위에 대해서는 모두 이야기하기 꺼리던 때였다. 누동학원에 머무는 대학생들도 서로 말조심 몸조심 할 만큼 심상치 않았다.

윤 시인이 안면도에 온 지 한 두 달 지났을 무렵 누동학원 교사와 학생들은 안면도 끝 영목에서 배를 타고 원산도로 소풍을 갔다. 그곳 중학생들과 축구 시합을 벌였는데 그때 윤 시인이 응원가로 ‘We Shall Overcome’을 열창했단다. 그 자리에 있던 교사와 학생 모두 경악했다. 본래 평화와 인권의 노래라지만 당시에는 대학가에서도 진보적인 데모가였다. 이 자리에 있었던 누동학원 김영근 선생은 ‘1980년, 그때 만난 윤중호'라는 글에서 "야학 선생도 기껏해야 김지하 선생의 '금관의 예수' 정도였고 조금 진일보 해서 김민기 선생이 작곡한 '공장의 불빛' 노래가 보급되고 있었으나 이 역시 매우 서글픈 노래였다. 그런데 We Shall Overcome이라니…"라고 썼다. 

5월18일 광주, 일반인들에게 5월 광주는 폭동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전국적인 화제였다. 안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도에서 시집온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마을주민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장례식은 상여 없이 약식으로 치러졌다. 그 애기무덤 앞에서 넋 놓고 있었다던 윤 시인은 ‘그날 밤 드디어 사고를 쳤다’.

“그날 밤 녀석의 곱사춤은 우울하다 못해 서늘했다. 검은 점퍼를 뒤집어 쓴 채 어눌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 저리 돌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옥진 선생의 병신춤은 아마추어였다. 우리는 연신 웃으며 박수를 쳤지만 쓸쓸한 기분으로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아마도 새벽 2시쯤 되었다. 나는 아이들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순간 (윤중호가 있는)다락방에서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가 우울한 밤안개를 예리한 칼로 찢어내었다. 꽹과리 소리와 동네 아가들의 울음소리가 어수선하게 섞여서 마을 분위기를 더욱 침통하게 만들었다.” 김영근 ‘1980년, 그때 만난 윤중호' 중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사택에 돌아와서는 밤새 시를 썼다. 학교 밖에서는 마을청년과 술 마시며 어울리고 주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다. 이우인 선생 말처럼 ‘마을 일에 모두 관여하고’ ‘하여간 아이들 가르치러 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사람’이었다.

누동학원 학생들과. 가장 오른쪽 앞줄의 남자가 윤중호 시인이다. (사진제공: 이우인씨)

■ 안면도 푸른보리밭, 누동학원 아이들

“목발을 겨드랑이에 낀 채 푸른보리밭을 달리고 싶다던 ‘열’이는 짧은 머리칼을 뒤로 날리며 얼굴에 온통 보리색, 파란 물감이 든 채 웃고 있다./놈의 손을 잡고 있으면 우리 손에서도, 가슴에서도 보리익은 냄새가 날 것인가…(후략)” 윤중호 ‘누동학보 제26호―다시 학보를 내면서’ 중

시대의 암흑이 마을까지 흉흉하게 덮은 중에도 누동학원 아이들은 이와 무관하게 빛났다. 

“한동안 쉬었던 학보를 다시 내는 것만큼은 윤 시인이나 교사들이나 한 마음이었어요. 그때 학생들은 정말 살아있는 글을 썼거든요. 아이들이 글을 쓰고, 윤 시인이 한 줄 한 줄 필경을 했지요.” (이우인)

당시 학보가 아니라 이후 학보에 나온 글이지만 윤 시인이 아꼈던 누동학원 1학년 임종란 학생의 글을 전문으로 한 편 싣는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우연히 글을 전해받고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던 글이기도 하다.

"나와 아버지는 떼를 타고 밭일을 하러 갔다. 아버지와 나는 열심히 노를 저어 갔었다. 떼 위에서 아버지는 일을 하시고 나는 노를 저었다. 아버지는 나한테 "배고픈데 밥 먹어라"하셨다. 싸늘한 바람결에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안 잡수셨다. 아버지는 중얼중얼하시며 일을 열심히 하였다. "안 되겠다. 내가 물 속에 들어가야겠다"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에 젖지 않게 하라 하셨다. 목까지 차는 물에 들어가신다고 하셨다. 남들은 모두 허리 차는 데였다. 우리는 제일 물 아래였다. 아버지는 한참 하시더니 "도저히 못 하겠다"하시며 나오셨다. 그 날은 좀 쌀쌀하였다. 아버지는 나오시더니 막 떨으셨다. 말도 못 하셨다. 막 떠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담배를 달라고 하셨다. 옷속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얼른 꺼내 드렸다. 아버지는 계속 떨으셨다. 나는 볼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시며 밥 좀 달라고 하셨다. 밥통은 밥이 들은 채 물 속에 굴러 다니었다. 나는 물이 들어가서 못 먹는다고 하였다. 그래도 달라고 하셨다. 나는 풀어보았더니 물은 많이 안 들어 있었다. 차고 짠 밥을 아버지는 떨으시며 잡수셨다. "아버지 잡숫지 마셔요"하였다. "괜찮다. 너도 먹어라" 하셨다. 떼를 타고 올 때 아버지는 졸으셨다. 어떤 아저씨한테 "물 있나?" 하니 "응, 조금 있네" 하셨다. 달라고 하더니 그 물을 많이 잡수셨다. "짠 밥을 먹었더니" 하시며 …… 집에 와서 얼른 따뜻한 밥을 지어 드렸다." 79년 12월, 누동학원 1학년, 임종란 '누동학보 제29호' 중

"나는 한 인간, 아니 한 가족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겨울 한 때의 한 순간을 이렇게도 완전한 문학적 필치로 써내려간 글을 본 적이 없다. 글을 읽으면 누구나 정말 자기가 종란이가 되어 아버지를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고 있게 되지 않은가? 이 글을 읽은 1984년 이래로 나는 때로 나보다 한 살 어린, 내가 모르는,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오랜 친구이자 누이 같은, 종란이가 이 때의 일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기를, 그리고 아버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있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오덕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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