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옆에 우두커니 선 싸리 빗자루’

 

앞마당이 천길 이다.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니 코앞에 닿는 앞마당이 천리가 되었다. 집 뒤편 지척에 있는 영감 산소에도 혼자 갈수가 없다. 인생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지만 휴 한숨 한번 쉬며 내 처지와 같은 동무들을 생각하면서 위로 받는다. 대문 앞에 나란히 선 싸리 빗자루 마냥 애통한 거 불편한 거 쓱쓱 쓸어버리면 좋으련만. 모든 게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지만 몸이 말을 안 들으니 그 말을 통감 한다.

나도 지수리 모산 마을에서 벌써 60년이 지났다. 그 예순 해를 어떻게 넘어왔는지 기억도 없는 일들이 무수하다. 저수지를 끼고 돌며 마을길에 쭉 늘어서 경치 좋던 느티나무 길도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산 마을은 저수지가 있던 우리 마을을 못안 마을이라 부르다가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옮겨지며 모산이 되었다나. 아주 옛날에 저수지 자리에 무쇠를 만드는 대장간인지 제철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야 잘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철 만들던 곳이 저수지가 되었다니 믿기 힘든 얘기다. 그렇게 사라지고 생겨나는 건 우리 인생과 다를 바가 없다. 언젠가는 내가 모산에 살았던 기억을 아무도 해내지 못하는 때도 오겠지만.

안방 앞에 찰지게 붙여놓았던 버스 시간표도 이제 소용이 없다. ‘도농 성모 구읍 가덕 옥향 도근버스 정류장들. 옥천장날이면 삼삼오오 짝지어 한 보따리씩 들고나가 나물을 팔고 애들 양말이며 영감 메리야스를 사갖고 들어오던 버스길인데 이젠 그 불편하던 시절도 꿈같다. 나를 차 태워주는 이 없으면 옥천장날은 꿈속에서나 가볼 곳이 되었다.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무거운 짐 지고 버스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던 시절이 지금보다 더 상전인 때다. 내 몸뚱이 내 마음대로 하던 시절이니 몸으로는 그 때가 차라리 호시절이었다.

그래도 인생길마다 동무가 있어 꼼짝 못해 속 터지는 나한테 한집 사는 짝꿍이 생겼지 뭔가 문간방을 잠시 빌려 쓰는 우리 이웃 동생. 집을 새로 짓느라 임시 거처로 우리 문간방을 빌렸다. 그 동생은 갈비뼈를 다쳐서 허리에 복대를 차고 바깥출입이 불편하니 내 방으로 건너와서 둘이 누워 세월 타령을 할 수 있어 좋다. 아침 먹고 건너와서 하루 종일 놀다가 해 떨어져 그 집 영감님 들어오면 퇴근을 한다. 집 지어야 다시 들어가니 이번 한겨울은 군고구마 까먹으면서 심심치 않게 지낼 벗이 됐다. 동생은 아이구 허리야 갈비뼈야 나는 아이구 다리야 하면서 둘이 쳐다보며 박장대소를 한다. 소근소근 얘기도 하고 힘들면 둘 다 같이 누웠다가 단잠도 자고 느적느적 소일을 한다. 지금 나한테 여간 고마운 동무가 아니다. 둘이 서로 쳐다보면 행색은 웃음밖에 안 나오지만 그 덕에 긴 하루를 나누는 동무가 되었다.

 

마당 넓은 집, 상여 나가기만 좋았다.

아침이면 방문을 열어 재끼고 넓은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숨도 간간이 토해내면서 이제는 쳐다보기만 하는 마당이다. 30년 전 50줄에 세상 떠난 우리 영감 상여 나가던 날 애간장 끊어져서 이제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요령잡이 선창보다 내 통곡소리가 더 컸을 거다. 태어날 땐 혼자 울고 떠날 땐 여럿이 같이 울어 주는 게 인생이라고 그 소리에 어찌나 울었는지 영감 상여 나갈 때도 가슴을 후벼 팠는데 지금은 어째 기억도 까무룩 하다. 내가 그 속을 어떻게 달래며 살까 염려했더니만 세월은 참으로 야속하다. 영감이 꿈에도 한번 안 나타나네. 거기서 잘 사는지 내 마음이 변한 건지 남들이 속 모르고 꿈에 안보이면 잘사는 거라니 뒤집어 보면 꿈속에서도 볼 수 없으니 이젠 영영이별이라! 그 아쉬움을 달래는 빈말들을 만들어 놓은 거 같다. 영감 살리겠다고 서울 이며 대전 병원을 백방으로 다니며 애썼지만 결국 집에 와서 초상을 치룬 그날은 이미 오래전 희미한 기억의 자리가 되고 말았다.

 

! 글쎄, 영감 떠나던 날 말이야.

숨을 헐떡이며 윗마을 사는 오촌을 불러오라하데. 연통을 넣어 불렀더니 입술에 겨우 붙은 숨으로 당신 가면 앞으로 조상님들 제사를 가져가서 지내라고 말이야. 참말로 그 놈의 제사가 뭐라고 숨 넘어 가면서도 제사 걱정을 하니 뼛속까지 배인 그 조상타령이 장한일인지 쓸데없는 일인지는 몰라. 숨을 헐떡거려 내가 끌어안고 눈 떠보라하니 한바탕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어째 더 이상 소리가 없어 머리를 내려놓으니 고개를 딱 떨구는거야. , 기막혀 사람이 그렇게 가데. 영감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이 마당에서 시할머니 시어머니 영감 다 보냈지 뭐야. 시어머니는 3년 전 96세까지 사셨어. 당신 아들 먼저 보낸 아쉬움에 시어머니는 호상소리 들어가며 상을 치렀네. 집 뒤 켠 밭에 묘 자리를 정했어.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남편까지 간간이 나도 빨리 옆자리 차지하고 눕고 싶어.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하니 영감을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가 없잖아. 세월은 쏜 화살 같은데 하루는 왜 이리 긴지. 나이 들어 건강을 잃게 되는 건 당연지사인데 하필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해서 답답해. 안방에 큼지막한 액자에 한창 농사지을 때 사진이 턱 하니 걸려있어. 동네 이장이 사진하나 찍어주더니 대문짝만하게 액자에 넣어 갖고 왔네. 걸어두고 쳐다보면 그래도 뙤약볕에 일하느라 얼굴은 새까맣고 힘들었지만 밭에서 한창 농사짓던 그 시절이 좋았더라고.

 

청성면에서 태어나 22살에 지수리로 시집와서 예순 해를 넘게 보냈어.

친정에서 3남매로 자랐어. 언니 송양순 오빠는 송인기 나는 송일수 단출한 3남매 언니 오빠 이름을 언제 불러봤나 몰러. 양식걱정은 안했던 집이라 아버지는 나를 농사도 시키지 않았어. 그저 논 밭 일 일손 돕는 정도로 큰 애기 시절을 보내고 22살에 올케 친정어머니가 중매해서 시집을 왔지. 우리 영감은 인물이 좋았어. 똑똑했지. 희귀성인 지씨 지판준, 나도 아들 둘을 뒀는데 우리 아들은 지기호 지기정. 친정에서 일은 많이 안했지만 그래도 시집왔으니 남편 하는 일은 도왔지. 논둑을 손으로 직접 다지고 농작물을 옥천 시장에 팔러 다녔어. 고추 콩 나락 쌀농사를 천 평 정도 했어. 적은 농사는 아니어서 일손 돕느라 적잖이 일은 했지. 다행인건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후덕한 분들이라 사랑받고 시집살이는 안했어. 그래서 시할머니 상여 나갈 때도 통곡을 했지.

인생은 요지경이라 우리 집 넓은 마당에서 상여도 나갔지만 풍물 놀이패가 시연을 하기도 했어. 초상도 치르고 잔치도 벌인 거지. 인생이 다 그래. 오늘은 웃고 내일은 울고 그렇게 말이야. 안남 사람들이 흥이 많은가 풍물패 나가면 상도 받고 나도 장구 치면서 흥에 겨웠던 시절이 있었네. 다 꿈같은 옛일이지. 이젠 지척에 둔 영감 산소에도 못 가보니 시절을 원망할 것도 없고 나이 드는 이치에 순응해야지 어쩌겠어. 이 나이에 훨훨 날수 없다면 그래도 벗이 있어 같이 수다라도 떨 수 있으니 감사하지. 작은 바람이 있다면 가슴에 사무친 답답한 심사 대문 앞 싸리 빗자루로 싹싹 쓸어버리고 인생 갈무리를 깔끔하게 하고픈 마음이야. 이젠 쌓아 둘 때가 아닌 버리고 쓸어 낼 때, 싸리 빗자루가 제대로 한 몫 할 때가 바로 지금 아닐까?

이기숙 작가
이기숙 작가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