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원
돌람 조천수 형님의 죽음을 애도함
형님,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높은 다리에서 그 깊은 물속으로 어떻게 뛰어내리셨을까.
그것도 한 밤중에 얼마나 괴로웠을까.
분노 좌절 회한 공포 수치 허무 가운데 무엇이 형님 등을 떠밀었을까.
우울증으로 차 사고를 내신 적이 있지만, 그 우울의 힘이 가족의 사랑보다 형제의 우애보다 이웃의 인정보다
생명의 존엄보다 더 센 줄 몰랐습니다.
주검을 찾으러 1주일동안 강다리 오가며 고뇌하다 깨달았습니다.
우울이 저승사자라고. 아니면, 형님의 투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 슬픕니다.
장계강다리 그 지점에 서서 회상했습니다.
6.25 났을 때 낮고 작았던 이 다리를어머니 형님 누님 저 넷이 건넜습니다.
어제의 일처럼 기억합니다.
제가 다리 아프다고 울자, 형님이 달구지에 저를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창말이던 안내면을 지나 밤티에서 3개월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살기 어려웠지만, 인정이 넘치는 때라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형님이 배우고형님의 도움으로 제가 공부했습니다.
누님한테는 지금도 미안합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3남매가 오늘날까지 우애 좋게 살아왔습니다.
형님은 고위공직자로 저는 대기업임원으로 봉직, 근무하다 이제 은퇴하고 여생을 즐기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이라는 병마가 형님을 데려갔습니다.
아, 옥천 향토사 한 조각이 사라졌습니다.
형님주검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형수님 누님 조카들과 그 아이들과 저는 두려웠습니다.
시신이 없어 장례도 치르지 못하면,형님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하나하고.119구조대와 경찰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가을장마로 불어난 강물을 1주일 내내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시대가 좋아져 그렇지 옛날 같았으면, 주검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형님
저는 형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만, 운명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넋은 아직 이승에 있다고 믿습니다.
가시기 전 형님과 대화하기를 소망합니다.
우울증의 원인에 대한 대화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형님은 가셔도 제 마음속 형님은 살아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는. 잘 가십시오. 형님, 명복을 빕니다.
위는 조천수(1934 ~ 2019)씨 아우 김기원(1943 ~ )의 조사입니다. 조천수씨의 실종이후 장례에 이르기까지 걱정하시고 도움을 주신 이웃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와 특별히 고인의 옥천교회 교우 여러분의 헌신에 감사를 표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