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시 곶감처럼 내 세월도 단단하고 찰졌네.

 

■ 가을이 익어간다.
모산 마을만큼 나이 먹은 감나무에서 투욱 툭 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라. 둥시 깎아서 마루 위 시렁과 부엌 시렁에 감꼭지를 묶어 두면 살랑살랑 바람에 말랑말랑 설탕 덩어리 곶감으로 다시 태어나지. 감나무는 봄이면 제 혼자서 하얀 감꽃을 피우고 늦가을이면 나무에 매달려 새들에게 공양밥으로 먹힌다. 야무지게 한 해를 산다. 지독스리 힘든 해거리 다음이라 올해는 멀리 보이는 둥시가 빽빽하게 달려 보이네. 63년 전 내가 시집올 때도 회관 멀리 언덕에 서 있던 둥시 감나무는 세월의 풍파 고스란히 담아낸 내공으로 올해 유난히 잦았던 태풍에서도 끄떡없었지. 둥시만큼이나 내 세월도 그러하구마. 

출생신고를 일찍 하면 자식 잃는다는 노파심에 부모님들이 나 태어난 지 5년이나 지나서 이름을 호적에 올렸다. 청산면 느럼실(금리)에서 16살에 친정이 모덕리로 이사왔는데 밥은 먹고 살았으니 잘 사는 축에 들었다. 모산에서 사는 이종 간 사돈이 멋진 총각 하나 있다고 중신을 서서 우리는 결혼 전에 요즘 아이들 말로 데이트라는 걸 몇 번 해보았다. 이름이 정 수용이라 불리는 멋쟁이 총각은 모산에서 나고 자라서 평생을 모산에서 살았다. 인물 훤칠하고 말 잘하고 싹싹한 그이는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옷을 쫘악 빼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모덕리 마을 입구 느티나무 옆으루다 세워놓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고등학생 모자를 삐딱하니 쓰고 모자 창을 이리저리 만지며 의기양양하게 걸어왔다. 60년 전 그땐 그이도 제법 근사했다. 삐까번쩍한 오토바이가 동네를 가르던 굉음을 멈추고 얌전하게 서 있으면 동네 꼬마들부터 어른들까지 오토바이를 만지다 뜨거운 엔진통에 화들짝 놀라고, 참으로 멋지다고 한마디씩 거들 때마다 나는 약간 으쓱해서 기분이 삼삼했다. 아마도 지금 외제차만큼 뽀데 났을거다. 빌려온 오토바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다.

■ 고운 꿈 하나 있었지.
친정에서 결혼식을 하고 가마를 타고 모산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시집올 때 치마 1죽, 몸빼 1죽, 저고리 1죽을 해왔다. 10벌이 1죽이니 나도 혼수를 적잖이 했다. 이불보, 베갯보, 벽보도 광목에 십자수를 곱게 수놓았다. 십자수 놓는 책은 보기만 해도 고와서 손으로 살며시 만져보며 그렇게 예쁘게 살고 싶었다. 뽄(본) 대로 바늘에 고운 색실 꿰어서 몇 닢 뜨면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번듯한 나무 위에 휘영청 달도 걸렸다. 아들 딸 잘 낳고 금실좋은 부부로 살겠다는 고운 꿈을 담아 한 땀 한 땀 완성하였다. 마을 입구가 좁아서 트럭으로 실어온 살림을 소재지 배밭 강변에 내려놓고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몰려가서 물건을 날라준 것이 아직도 고맙다.
아, 그런데 시집을 와서 허름한 장독대에 놓인 항아리를 열어보니 된장도 간장도 제대로 담기지 않은 빈 독 몇 개가 전부였다. 시아버지는 한 분인데 시어머니가 두 분인 거라. 큰 시어머니는 딸 하나만 놓고 말아서 곧 작은 마누라를 들여서 아들 셋을 놓아서 첫째가 바로 나의 신랑이고 중간에 하나는 잃고 막내 시동생은 겨우 7살이었다. 두 시어머니는 성격이나 머리 쓰는 것도 비슷해서 큰 싸움 없이 지내고 돈 돌아가는 것은 죄다 시아버지가 결정하셨다. 그 때는 그렇게 여자의 인생이 서글프기도 했다. 윗방은 우리 부부가 쓰고 안방은 큰 시어머니 혼자 쓰시고, 사랑방은 시아버지와 작은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이 함께 썼다. 처지가 다른 여럿이 식구가 되어 만났다.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끌어안았다.

■ 슬픔을 가슴에 묻었네 
땅은 있었는데 두서없이 운영 하게 되어 시아버지가 장예쌀을 ( 쌀 1말 빌리면 나흘 일해주고 갚는다. )해서 먹고 살았는데 그 와중에 남편은 자유당 출마 국회의원 선거운동 하느라 빚을 많이 졌다. 그 땐 활동 좀 하는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떤 모양이든 선거판에서 입지를 다지고 싶어 했다. 우리 집 양반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소엔 부처님인데 술만 들어가면 곤조를 피우고 괴롭혀서 동네가 시끄러웠다. 윗마을 아랫마을 거나하게 술 취한 남정네들 소리가 저녁마다 들리던 때다. 큰딸이 평택에서 공장을 다니며 동생들을 불러들였다. 둘째 아들은 샷시 만드는 일을 배워 우리에게 소도 사주고 땅도 사주었다. 그런 둘째가 배가 아프고 밥도 못 먹더니 병원에 입원한지 3개월 만에 췌장암으로 죽고 말았다. 그 애를 낫게 할 수 있다면 미국에라도 보내려 했으나 암만 돈 있어도 못 고친다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을 난 그 때 똑똑히 알았고 그때부터 내가 혼절해서 정신이 나가더니 총기가 흐려졌다. 새끼 앞서 보내는 애미 마음은 절대 온전할 수 없다. 

■ 비법 환을 만들어서 집을 일으켰다.
모산은 숲이 우거지고 땅이 비옥해서 약초들이 지천이었다. 7월부터 겨울 될 때까지 논두렁 밭두렁에서 소태잎, 구절초, 인진쑥, 우슬뿌리, 또 한 가지가 뭐더라? 암튼 5가지 잎을 뜯어서 볕 좋을 때 바짝 말려서 절구에 빻아놓는다. 방앗간에서 아주 곱게 보리가루를 내서 국수 반죽처럼 5가지 가루와 섞어서 환을 만들어둔다. 거기다가 산에서 캔 칡을 깨끗이 씻어서 망치로 두들겨 부드럽게 한 후 가마솥에 삶는다. 물만 짜서 하루를 졸이면 조청처럼 되는데 미리 만들어 놓은 환에다 붓으로 칠하면 까무족족 반질반질해진다. 배 아프고 삭신 쑤시는 신경통에 특효약인 환인데 안남면 사람들 대대로 집안 비법으로 내려와서 농사가 끝난 겨울에 나는 2가마니씩 만들었다. 그걸 옥천과 이웃 동네에 팔아서 큰아들 대학까지 가르쳤다. 사실 충남대 시험 치러 갈 때 떨어지길 바랬는데, 내 어깨를 주무르며 “엄마, 됐어요.”하고 말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것도 이제 옛일이다.

■ 정 수용씨 다시 태어나다
사람이 열 번 바뀐다더니 남편이 갑자기 늦게 철이 나서 언제부턴가 술을 마셔도 조금씩 자시고 주사도 줄고 돈 욕심도 생기고 살림도 거들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더덕농사에 혼신을  다한다. 동네 아줌마들이 입만 열면“만순네 아버지 정 수용씨가 나이 먹을수록 철난다.”고 노래를 부른다. 하도 밭을 많이 매서 허리가 꼬부라져 버린 내게 남편이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며 내 허리를 주물러주다가 오늘까지도 모산의 전설이 되었으니 사람에 대한 기대는 끝까지 가져볼 일이다. 참고 살았던 내 인생에 꽃이 활짝 핀 것 같다. 머잖아 처마 밑에 주렁 주렁 달릴 곶감 같다. 겹겹이 주름이지만 흉내 낼 수 없는 당도로 호랑이도 맥 못 추게 하는 곶감. 이렇게 인생의 달콤한 맛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연자 작가
이연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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