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표(옥천향토전시관명예관장)

압록강 변 의주로 피난한 선조께서 조헌 의병장의 청주성 탈환소식을 보고받고 말하길 당나라 현종 때 장안성 밖 수양성에서 양귀비 때문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맹장 장순(張巡)장군과 같은 조선을 구한 의병장이 중봉 조헌이구나!”라고 감탄했다는 글이 실록에 기록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대항한 만고충신 조헌 의병장의 충의정신을 되살리고 추모하는 제44회 중봉충렬제가 1010~12일까지 안남 표충사에서 추모제향을 비롯하여 옥천읍 일원에서 44회 중봉충렬제가 개최된다.

그는 1544년 김포군 감정리에서 사대부 집에서 태어났다. 호는 중봉, 후율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에 대항타가 순국한 공훈으로 문열공 시호와 충신문을 받았다.

그의 호는 중봉, 후율, 김포 출생, 조선 중기 유학자이며, 경세가이고 330수의 시를 남긴 대시인이다. 그는 충청우()의병장으로 청주성을 탈환했고 금산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만고충신이다. 성균관 재학시절 왕실의 불교 관행을 비판했고 24세에 문과 급제 후 교서관, 정주, 파주, 홍주 교수. 교서관 정자를 지냈다. 4개월간 명나라 사절단으로 다녀오면서 견문 일기인 조천일기가 있고 국왕께 올린 상소를 모은 동환봉사가 있다. 그는 올 곧은 관리로 정여립 비판하는 상소, 시무 폐단, 일본과 통교에 반대 상소를 올려 선조의 미움을 받는다.

1976년 옥천중에서 개최된 1회 중봉충렬제
1976년 옥천중에서 개최된 1회 중봉충렬제

 

그 후 호조, 예조좌랑, 사헌부감찰을 거쳐 통진 현감이 되었으나, 부평에 유배되기도 했다. 1581년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을 지냈고 1582년 계모 봉양을 위해 보은 현감으로 나갔다. 퇴임 후 안내면 용촌리 후율정사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을 하였다.

1978년 중봉충렬제, 삼양리 중앙약국 앞
1978년 중봉충렬제, 삼양리 중앙약국 앞

 

1592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보은 수리티재에서 청주로 진출하는 옥천, 보은, 청주 의병으로 왜적을 무찔렀다. 이어 6월부터 의병을 모집하여 옥천, 보은, 공주, 홍주 등 충청도 의병을 이끌고 81일 왜군이 점령한 청주 탈환전에 영규대사 의승장, 충청좌()의병장 박춘무 의병장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조헌은 817일 호남에 진출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일본군 15천명에 대항하여 700명 의병과 영규대사 의승군과 함께 금산 연곤평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남 조완기와 함께 순국한다. 옥천 안내면 도이리에 장례를 모셨다. 그 해 12월에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임진왜란이 종전 직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또 영조시절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고종 때 문묘와 전국향교에 배향된다.

임진왜란과 40년 후 병자호란이 끝난 후인 1636년 묘소를 안남면 도농리 표충사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그곳에는 충청북도 문화재로 <조헌 묘소>,김상헌 선생이 지은 <조헌 신도비>, <영모재 재실>이 있다. 그밖에 이곳에 표충사, 조헌 시비, 하마비가 있다.

칠백의총박물관의 문과급제 교지와 화살통 은 국가보물 1007호가 있다. 한편 금산에서 조헌 선생 제자인 전승업과 박정량 선생이 700의병 시신을 모아 칠백의총을 조성했다.

옥천에 관련한 역사유적으로 율원9배경지인 <율원9>의 서화천과 안내면 도이리에 충북문화재인 <후율당>과 용촌리 <유상지석>이 있고 그가 강학했거나, 위패가 모셔졌던 <창주서원 묘정비>, <옥주사마소>와 영규대사와 함께 영정을 모신 <가산사 영정각>, 그밖에도 강학한 <이지당>, 청산의 <덕봉서원 터>, 동이 <쌍봉서원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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