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 (여행사진작가 / 안남초 31회 졸업)

제주도의 봄이 유채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억새의 계절이다.

제주도 오름은 물론 온 천지가 억새로 뒤덮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억새와 갈대를 혼동하는 여행객도 있다.

갈대는 보라색이던 꽃이 시간이 지가면서 이름과 같이 갈색으로 변하지만, 억새는 보라색을 벗어던지고 은빛으로 피어난다. 어디든 억새는 보라색에서 은빛으로 넘어가는 10월 중순이 가장 예쁘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시기다. 오래오래 두고 보기에는 노년기에 해당되는 은빛 억새가 아름답다.

오름에 오르거나 내려올 때 눈앞에 환하게 전개되는 억새도 예쁘지만, 뒤돌아보면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게 억새다. 특히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 억새 앞에서 햇살이 부서질 때 예쁘다. 억새는 역광이나 사광에서 사진을 찍으면 예쁘다.

제주도의 가을이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억새는 소나 말의 먹이로 쓰는 엔실리지(Ensilage)를 만드는 데 유용한 목초이다. 억새꽃이 피기 전에 베어 만든다. 겨울이 되면 제주도 산과 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닐로 둘러싼 하얀 둥근 통이 바로 억새로 만든 겨울용 가축먹이 엔실리지이다. 제주도 중·산간 어디나 아무렇게나 잘 자라고 있는 억새가 가축의 중요한 먹이인 천혜의 자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금백조로

20188월 도로확장공사를 이유로 삼나무를 베어버린 사건으로 유명한 비자림로(1112)의 대천교차로와 송당교차로 사이에 있는 편백나무조림지에서 서성일로(1119)의 수산2리입구 교차로까지 약 10km금백조로라고 한다.

이전에는 주변에 오름이 많다고 해서 오름사이로라고 불렀다. 낭만적이고 부르기도 좋았는데 이제는 아쉽기만 하다. 연인끼리 자동차로 드라이브하기 좋은 아름다운 도로다. 주변에는 아부오름, 백약이오름, 거미오름, 낭끼오름 등 우리 귀에 낯익은 오름이 송당리와 수산리 주변에 걸쳐 있다.

백약이오름 정상에 올라 수산리 쪽으로 길게 나있는 길을 내려다보면 가슴까지 뚫리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승용차로 달리면서 억새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가을 햇살이 한창인 오후 3시쯤 수산2리입구 교차로에서 송당리 쪽으로 달리다 보면, 은빛으로 곱게 치장한 억새를 마음 놓고 볼 수 있다. 오전은 그 반대다. 역시 억새꽃은 역광이나 사광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가을이 조용히 내려앉은 시월의 금백조로엔, ‘가을가을하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도로가 좁아 승용차에서 내려 사진 찍기가 불편하고, 교통사고의 위험도 따른다. 두 사람이 동행하고 있다면, 한 사람만 내려서 억새를 촬영하고, 운전자는 적당한 곳에서 유턴하여 돌아와, 동행자인 촬영자를 탑승시키면 편리하게 찍을 수 있다. 그만큼 도로가 협소하여 위험하다는 뜻이다. 차라리 승용차로 시원하게 달려보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

〈금백조로 억새〉
〈금백조로 억새〉

아끈다랑쉬오름

나지막한 오름 아끈다랑쉬오름은 온통 은빛이다. 멀리서 바라보면서 상상했던 대로 억새로 가득하다. 오르내리는 길이 계단으로 이어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여행객이 덜한 것 같다. 그러나 짧은 거리이지만, 길이 가파르고 흙이 미끄러우니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한다.

오름에 올라서자마자 서녘 햇살이 드리워진 앞에 서있는 손자오름의 아름다운 능선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부드러운 능선을 아름다운 여체로 착각해 넋을 잃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옆에 있던 아내도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다랑쉬오름과 주차장을 같이 쓰고 있는 아끈다랑쉬오름에 접근하려면 월정리, 평대리(1112)에서 비자림을 거쳐 다랑쉬북로와 다랑쉬로를 거쳐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또 송당사거리에서 출발한다면 손자봉삼거리(1136)에서 왼쪽 비포장도로인 다랑쉬오름쪽으로 들어단다.

〈아끈다랑쉬오름 분화구 및 억새〉
〈아끈다랑쉬오름 분화구 및 억새〉

용눈이오름

오름의 형상이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는 용눈이오름은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손지오름과 가까이에 있고, 주차장이 넓어 백약이오름과 함께 방문객이 많아 제주도 여행객이 선호하는 곳이다. 오름에 오르는 길도 경사가 작아 오르기에도 편하다.

오후 햇살에 가늘게 날이 선 오름의 능선은 솜털이 뽀송뽀송한 어린아이 팔뚝 같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억새의 물결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앞을 보면 한창 예쁘고, 뒤를 보면 더 예쁜 곳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영갑 사진작가가 목숨과도 바꾼, 그렇게 사랑한 오름이 용눈이다. 오름과 바람을 주제로 20년 동안 카메라를 메고 다닌 그는 지금은 죽은 나무인 근처의 김영갑 나무에서 용눈이오름에 청춘을 바쳤다.

언제나 예쁘긴 하지만 새벽에 해돋이 사진을 찌고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억새는 감히 장관이다. 해질녘 손지오름 억새가 아름답고 눈부시다.

〈용눈이오름에 오르는 길 억새〉
〈용눈이오름에 오르는 길 억새〉
〈용눈이오름 억새〉
〈용눈이오름 억새〉

따라비오름

제주도 368개 오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따라비오름의 억새는 녹산로 유채와 함께 가시리를 대표하는 명물이 된지 오래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곧바로 오름 정면에 나 있는 길로 오른다. 하지만, 계단으로 되어 있는 절벽 같은 앞길로 가지 말고, 야외용 나무벤치가 있는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힘들지 않고 서서히 오르면서 풍성한 억새와 드넓은 가을 벌판을 내내 감상할 수 있다.

오름의 뒤, 북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기도 하지만, 세 개의 능선이 한눈에 보여 아름다운 따라비오름을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해질녘 가을 햇살 깊게 받은 능선을 두고 아름답다는 말을 아낀다면 어디에 쓰려는지.

조금 먼저 올라가 삼각대를 받쳐놓고 한창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나에게 뒤따르던 수녀 두 분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한동안 무엇을 쳐다보다가, “이 꽃 이름이 뭐예요?” 하고 내게 묻는다. 한참을 더듬어 겨우겨우 물매화라고 대답하고는, 나도 다시 한번 자세히 보았다.

대부분의 오름은 한 개의 분화구를 가지지만, 따라비오름은 특이하게도 3개의 분화구를 가졌다. 분화구의 크기가 비슷하여 균형 잡힌 모양이라 보기도 더 예쁘다.

역광을 마다 않는 억새는 영롱함과 더불어 찬란함도 함께한다.

〈따라비오름의 분화구 억새〉
〈따라비오름의 분화구 억새〉
〈따라비오름 억새〉
〈따라비오름 억새〉

새별오름

공항을 오가는 차창에 전개되는 평화로의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가슴을 트이게 하는 한여름 팥빙수와 같다.

새별오름은 3월에 축제가 끝날 때 마른 억새를 태우기 때문에 잡풀이 자라지 않고, 불에 탄 풀잎으로 영양이 충분해 억새줄기가 굵고 튼실하다.

해질녘 꼭대기에 앉아 서쪽 은빛억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롱한 물방울이 하늘 가득 날리는 듯 착각에 빠져 한없이 그 자리에 앉고 싶을 때가 있다.

오름의 높이는 519m로 오르는 길이 단순하여 어렵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주차장이 워낙 넓어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공항에서 22km 거리에 있으며, 평화로(1135)를 달려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서귀포에서 접근한다면 평화로 제2봉성교에서 좌회전한 후 바로 다시 우회전해야 하는데, 이때 조심해야 한다. , 좌회전(월각로로 진행)하자마자 우회전하지 말고, 좀 더 직진한 후에 우회전해야 한다. 바로 우회전하면 제주 방향에서 내려오는 일방통행로로 역주행하게 되어 대형 사고의 위험이 있다. 본인도 한 번의 그런 경험이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새별오름 억새〉
〈새별오름 억새〉

정물오름

금악리 주변에는 오름이 많아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지만, 정물오름은 금오름과 (동광)당오름을 가까이 볼 수 있어 더 좋다.

입구엔 샘 정()자와 물 수()의 뜻을 가진 정물이라는 웅덩이가 있고, 오래 전부터 마을 식수로 사용했다는 팻말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여기도 43의 아픈 흔적을 간직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지난여름 더위를 무릅쓰고 정물오름에 올랐을 땐 한림읍으로 가는 길게 뻗은 금악리길(1115)과 바로 앞 목장의 넓은 초지와 성 클라라 수도원, 성 이시돌 요양원을 비롯한 아기자기한 성당 건물에서 평화롭고 목가적인 제주도의 풍경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사방이 온통 억새로 둘러싸여 은빛 물결로 출렁인다. 눈앞에 전개된 은빛 물결에 취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가 잠시 뒤를 돌아다보니 거기엔 더 아름다운 역광의 은빛물결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내내 서 있고 싶다.

제주공항에서는 평화로(1135) 광평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평화로로 2.5km 주행 후 좌회전하면 바로 정물오름 주차장에 도착한다.

또 한림읍에서는 한창로(1116)와 산록남로(1115)가 만나는 곳이며, 신록남로(1115)가 시작되는 이시돌삼거리에서 1.3km 떨어진 곳에 있다. 성 이시돌 젊음의집을 지나 바로 우회전하면 주차장이 나타나고 정물오름이 보인다.

〈정물오름 억새〉
〈정물오름 억새〉

손지오름

중산간동로(1136) 송당사거리에서 4.4를 지나면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으로 갈라지는 손자봉삼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0.5를 더 진행하면 오른쪽에 손지오름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이 보인다. 1~2대의 주차가 가능한 공간도 있다.

앞만 보고 올라가면 바로 앞에 삼나무가 우거진 손지오름이 보인다. 오르는 길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억새 숲을 헤치고 5분만 오르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분화구가 보이고 따사로운 햇살에 반짝이는 억새가 살랑대는 가을바람에 흥겨워 사각사각 소리 내 노래한다. 넓은 분화구와 아름다운 능선이 여행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역광에 빛나는 은빛억새가 넓은 분화구에 이어 내 가슴에 마구 달려든다. 다시 탄성이 터지고 만다.

해질녘 아끈다랑쉬오름에서 바라보는 솜털이 뽀송뽀송한 손자봉의 능선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손지오름 억새〉
〈손지오름 억새〉
〈손지오름 억새〉
〈손지오름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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