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한가위가 지나고 나니 하루가 다르게 추색(秋色)이 완연하다. 하늘이 아니 높을 수 있겠는가. 들녘도 제법 황금색으로 치장을 서두른다. 집사람이 무더위에 물을 주면서 정성스럽게 가꾼, 마을 초입의 코스모스가 빛을 뽐낸다. 형형색색의 옷차림으로 하늘거리는 몸 사위가 사뭇 정서를 자극한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전부를 밀어 올린 덕분이다. 상처를 결실의 보람으로 꿋꿋하게 믿은 덕택이다. 

순수자연의 품성이기에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

여섯 살 손녀와 할머니가 이랑을 타고, 무 씨를 파종하던 모습이 연상된다. 손녀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모습이다. 무 씨앗 하나하나가 신비하고 경이로운 눈빛이다. 눈동자가 수정처럼 맑게 빛을 발한다. 할머니의 설명을 들은 손녀가 걸음새도 비장하게 씨앗을 뿌린다. 자세가 너무도 숙연해, 옆에서 지켜보던 나의 웃음보가 터진다. 며칠 후, 고운 씨앗이 얼굴을 내밀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늙은 할머니가 뿌린 씨앗은 듬성듬성 났는데, 손주가 뿌린 씨앗은 빈틈없이 뾰족하다. 동심과 천심이 일맥상통했나보다. 이렇듯 인간도 욕심만 버리면 자연이다. 우리는 이 작지 않은 섭리를 거역하면서 산다. 세상사가 번잡한 이유다.

자연은 순리다. 순리는 언제나 생명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보듬고 돈다. 

가치가 전도된 사회는 혼탁하다. 정치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정치가 길을 잃고 방황하면 골병이 드는 것은 국민이다. 작금의 세태가 그렇지 아니한가?  언제부턴가 위정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밥값을 못하는 집단으로 전락하는 추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치가 무엇인가?  제 배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불구하고 가식과 위선의 날개가 판을 친다. 정도를 지키는 사람들이 숨을 고를 수 없을 정도로 공해가 심각하다. 젊은 청년들이 분노하는 세상은 썩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미래가 없다. 왜 그들이 저토록 절망하는가? 공인(公人)은 말과 행동과 글이 일치돼야 한다. 이율배반의 논리가 팽배한 사회, '내로남불식'행태를 밥 먹듯 하는 위정자들이 원인이다. 

이러니 어찌 젊은 청년들이 좌절과 배신의 늪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 정부는 각성할 일이다.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분노하면서 들었던 '촛불정신'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벌써 권력의 타성이 안목을 가렸단 말인가? 왜, 선량한 서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가? 차마 TV를 틀 엄두가 안 난다. 언론을 대하면 진절 몸서리가 난다.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이 든다. 나만 그럴까? 국민의 눈높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사꾼들이, 줄줄이 장관감이라니 통탄할 일이다.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우리가 '촛불'을 든 이유는 일개 정당을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나라다운 나라, 사람 사는 세상'을 갈망했음이 아닐까.  위정자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묻고 싶다. 작금의 현실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오늘날의 국제정세는 어떠한가? 강 대 강의 권력들이 자국을 위해서는 원수와도 손을 결탁하는 세상이 아닌가.  

이 마당에 당파 싸움에 혈안이 되어있는 세태가 가소롭다. 조선조 말기의 형국이 생각난다. 꼼짝 못 하고 일본 놈의 손에 통째로 바쳤던 기억을 되돌아보자. 어느 선비가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가. 목숨 바쳐 국가를 보위한 것은 무지렁이 민초들이었다. 거대 여당과 야당이 벌리는 이전투구는 국민들의 의욕을 상실시킨다. 국민 정서에 반하는 정치가 정치인가. 위정자들은 모두가 똑같이 더럽다. 꼴사나워 눈뜨고 바라볼수록 역겹다. 왜, 이렇게 국민을 가볍게 보는가?

옛 선인들의 기본교양서였던 『천자문』에서도 주흥사는 역설하지 않았던가?

"이유유외 속이원장"이라고. 무식하게 직설하면 이렇다. 매사를 쉽고 가볍게 보는 것은 무서운 병이다. 심히, 두려워서 해야 할 바다. 늘, 담장에도 보는 귀와 눈이 있기에 매사에 자신을 경책하라는 말씀으로 나는 알고 있다.

국민들의 눈높이는 높지 않다. 결코 이것을 무시하면 화를 면치 못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법률가가 수식(修飾)해 놓은 법은 인간 최하의 말법이다. 법을 떠나서 사람과 국가의 근본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제시할 수 없고, 길이 아닌 곳은 권모술수의 장막이 활개를 친다. 위정자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근본과 원칙이 서면 길은 자연히 나타나기 마련이고, 만물은 그 길을 따라서 순행하는 것이 '인륜의 법칙'이다.

안영(BC578-500년)은 제(齊)나라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명재상이었다. 그는 남을 수용할 줄 아는 자량(資糧)을 갖춘 정치인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자신의 곳간을 헐었다. 그러자 제의 경공(景公)의 의심을 품게 되었다.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타국으로 은거하려고 했다. 그러자 평소 그의 인품을 흠모했던 북곽소(北郭騷)라는 사람이, 자신의 목을 베어 경공에게 바치면서 안영의 결백을 호소했다. 뒤늦게 깨달은 경공은 탄식했다. 그는 신뢰의 정치를 토대로 백성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던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울림이  작지 않음이 여기에 있다.

지난 태풍에 허리가 꺾인 코스모스가 처연하게 고운 자태를 뽐낸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허리로 자신의 전부를 던져 꽃등을 밝힌다. 삶에 찌든 민초들의 허리와 흡사 닮은꼴인 듯싶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모든 사람이 가을의 길목에서 나름의 행복을 구가했으면 좋겠다. 하늘의 모습을 닮은 감들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자연을 연주한다. 모두가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는 가을의 문턱이다. 가을엔 짐승들의 눈빛도 티 없이 맑다. 상처받은 모든 이들의 가슴에도, 따듯한 결실이 함께하길 기원하는 날이다. 남들이 행복한 것이 나의 작지 않은 청복이라면, 천치의 논리일까. 내 곁의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나는 천치라도 좋은 가을이다. 그대에게 축복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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