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동이 고향이었던 류석동, 서울서 대학교수로 일하다 옥천으로 돌아와'
'아들 이름은 류신일, 종로약국 오문한과 구읍사거리서 갈포공장 운영해'
'구읍 저수지 끄트머리 집 세 들어 살아…천상 호걸이었던 류석동'
57년 전 구읍 사거리서 갈포공장 운영한 김진헌씨가 기억하는 '류씨 집안'

죽향초 제59회 동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가수 김현식이 살던 집. 김진헌씨가 말한 류석동씨의 집 위치와 동일하다. 

[옥천인물발굴] 지난 8월29일을 기점으로 3회에 걸쳐 진행된 죽향초 제59회 동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가수 김현식이 1965년 9월 서울에서 전학을 와 1968년 9월까지 죽향초등학교에서 다니며 옥천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동창들의 구두의 증언을 통해 김현식이 살았던 집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가수 김현식이 일간스포츠에서 연재한 회고록을 통해 언급했던 것처럼 동창들 역시 김현식의 할아버지가 '구읍 사거리에 있는 갈포공장'을 운영했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가수 김현식이 옥천에 살았던 약 4년의 서사를 파악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그가 살았던 집의 위치와 그의 가족이 운영했다고 알려진 갈포공장. 그리고 무엇보다 가수 김현식이 어떤 연고로 '옥천에 머무르게 됐느냐'라는 물음에 답을 찾아야 한다.

그간 옥천신문에서 파악한 것에 따르면 김현식이 옥천에 머무르게 된 데는 옥천 출신 어머니 류진희씨의 영향이 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류진희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김현식의 외할아버지는 옥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라고 한다.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김현식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1965년 죽향리에 거주하며 그 시절 단상을 기억하는 이와의 만남이 절실했던 이유다. 다행히도 옥천문화원 김승룡 원장을 통해 그의 아버지 김진헌(88, 옥천읍 하계리)씨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진헌씨는 1932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샘실에서 태어났다. 전역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구읍 사거리에서 큰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한 평생 옥천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자수성가한 그다. 시간이 꽤 흐르기는 했지만, 누구보다 구읍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이번 '옥천 인물 발굴 김현식편'에서는 김진헌씨가 당시 만났던 김현식의 외할아버지라 추측되는 류석동씨와 그의 아들 류신일씨 등 가수 김현식의 외가였던 '문화 류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다음은 김진헌씨의 이야기를 1인칭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젊은 시절 김진헌씨의 모습. (사진: 옥천신문 자료창고)

■ 김진헌씨가 기억하는 '김현식 외할아버지' 류석동과 그의 아들 류신일

자네가 김현식 외할아버지라고 추측하는 이의 이름은 돌석(石)자를 쓰는 류석동. 그러니까 추소리가 집성촌인 '문화 류씨' 성을 가진 이다. 그가 가수 김현식의 외할아버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계신다면 110살 즈음 될 것이다. 그 양반은 본래 추동(추소리)에서 살다가 서울로 떠나 모 대학 교수로 일했다고 했다.

류석동씨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류신일이고, 나보다 한 살 위였다. 류석동씨의 아들 류신일씨는 당시 오문한이라고 종로약국을 운영하는 이와 함께 구읍사거리(현재 마당넓은집이 있는 곳) 부지를 매입해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나 역시도 31살, 그러니까 57년 전인 1962년 즈음 갈포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땅을 샀다. 당시 부지 전체를 사려고 했는데 돈이 모자라서 다는 못샀다. 우리가 먼저 이 자리에서 갈포공장을 운영했고, 당시 우리나라 웬만한 제약회사보다 돈을 훨씬 잘 벌었던 종로약국의 오문한씨가 자금을 대고 친구 지간인 류신일씨와 동업했던 것 같다.  

그의 딸은 나보다 2~3살 정도 어렸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딸은 당시 배우였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옥천에 와 있으니까 친구를 서넛을 데리고 가끔 놀러왔다함께 대화를 나눈 기억도 남아있다. 이 딸이 가수 김현식의 어머니인지는 잘 모르겠다. 

류석동씨의 처가는 죽향리에 있는 육씨 집안이었다. 류석동의 처남인 육상균씨가 현 명광정육점(옥천읍 하계리 48) 자리에서 살았다. 아무래도 처가가 이쪽에 있었고, 아들 류신일씨가 갈포공장을 운영하게 돼 옥천에 오게 된 것 같다.  

■ 갈포공장 공장장으로 3~4년간 일했던 '김씨'성을 가진 이 

당시 갈포공장 공장장은 서울에서 내려온 '김씨' 성을 가진 이가 맡았다. 그 사람이 류신일의 매제였는지, 김현식의 아버지인지는 확신이 안 선다.

다만 서울에서 김씨 성을 가진 자를 데려다 놓고 갈포 공장 근처 큰 기와집에 독채를 얻어 아내와 살게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사람이 반찬을 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 6~8살 아래였다. 등치도 있었고, 얼굴도 수려했다. 이 사람은 내려온 이후 한 3~4년 정도 일하다가 객지에서 큰 사업 한다고 떠났다. 

해당 자리에서 우리는 갈포공장을 한 십년정도 운영하다가 접었다. 류신일씨와 오문한씨가 같이 동업하기는 했지만, 실제 소유주는 오문한씨 명의였기 때문에 류씨 집안이 떠난 이후에 오문한씨의 처남되는 이가 이를 관리했다. 거기서 살다가 조금, 조금씩 땅을 팔아서 4~50년 먹고 살다가 마지막 남은 500평 부지를 팔아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류석동씨가 살던 구읍 저수지 끄트머리 집

류석동씨가 가수 김현식을 키웠는지 안 키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류석동씨의 집은 저기 끄트머리 죽향리 저수지가는 곳에 있었다. 당시 교육자 집안이었던 선씨네가 구읍 저수지 밑 큰 대문집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저수지쪽으로 50m 올라가면 골목길이 있다. 골목을 꺽어 들어가면 왼쪽 편에 집 한 채가 홀로 있는데, 거기가 류석동씨네 집이었다. 류석동씨는 이 집에서 세 들어 살았다.

가수 김현식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나는 김현식의 외할아버지라고 추측되는 류석동씨와 그 아들 류신일에 대해 기억할 뿐이다. 

 

어린시절 김현식의 모습. (사진 갈무리: SBS 스페셜 '전설의가객, 김현식을 노래하다')

 

김현식 6집 앨범사진(사진 갈무리: 지니뮤직)

김현식의 6집 앨범에 수록된 '내사랑 내곁에'는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운 노래다. 해당 앨범이 발표된 1991년 '내사랑 내곁에'는 캐럴보다 더 많이 불린 노래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김현식은 해당 앨범을 녹음할 당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없어 서둘러 6집 앨범 녹음 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결국 6집 앨범이 나오기 전 1990년 11월 1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다.

김현식의 6집 앨범 수록곡 중 해당 시기에 새로 녹음한 것은 '겨울바다'와 '사랑 했어요' 뿐이다. 나머지 곡들은 모두 5집의 미발표곡으로 알려졌다. 김현식 사망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6집이 세상에 선보여지고, 그해 2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내사랑 내곁에'는 1991년 영상음반 대상 시상식에 대상을 수상한다. 이날 시상식은 고인이 된 김현식 대신 아들 김완제씨가 대리 수상해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김현식 6집 다시보기

1. 내사랑 내곁에(타이틀)

2. 나의 하루는

3. 겨울 바다

4. 한국사람

5. 사랑 했어요

6. 추억 만들기

7. 사랑 사랑 사랑

8. 내사랑 내곁에(MR)

9. 이별의 종착역

10. 우리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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