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 문학의 향연
선한 이여
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네가 누워서 잠들던 땅을, 활보하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
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
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
선한 이여
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너의 웃음과 울음을 두고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를 두고서, 너의 온기를 두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두 묻어두고서
떠날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나에게도 무덤인데
-유병록, 옥천민예총 문학동인지 제22집 『소심한 복수』,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