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예쁘다’는 말에 설레는 만년 소녀

 

미소천사

어르신 너무 고우세요.”

시골 사는 할미라도 내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 난 활짝 웃을 수 있지. 주름진 얼굴도 웃으면서 보여줄 수 있어. 그렇게 살아왔어. 힘들어도 웃으면서 그건 어릴 때부터 잘 웃었기 때문 일거야. 난 대천 보령군 남포면 옥서리에서 8남매의 쫑마리(막내)로 태어났어. 6.25 나기 직전 집안 오빠가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었는데 나도 거기서 가나다라 한글기초와 구구단을 뗐지. 아침이면 거울 보면서 꽃단장하고 하하호호 웃으러 다닌 지 10년 차 안남학교 여학생이야. 개근상 감이지.

모란꽃 그려진 12폭 병풍

내가 스무 살 때 도농리로 시집간 친정언니네 다니러 왔다가 나를 본 이웃 아주머니가 남편을 중매했다. 내가 잘 웃고 착하고 예쁘게 생겼다며 칭찬의 말을 얹었다. 성실하고 인물 좋고 게다가 해병대 출신이라 사내다웠던 28살 먹은 정창기 총각과 연을 맺게 되었다.

기분이 시집가던 날!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앞마당에 멍석 깔고 한쪽에서는 가마솥을 걸어 국수를 삶아 내고 색색의 전을 부치느라 분주한 가운데 빌려온 12폭 병풍이 세워졌다. 병풍에는 부지런히 돈을 모으라는 닭과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모란꽃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사모관대를 쓴 훤칠한 신랑과 곱게 지은 한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자그마하니 어여쁜 색시는 동네 사람들의 축복과 덕담을 들으며 혼례를 올렸다. 손톱 위에 명반에 짓이긴 봉숭아꽃 올려주며 실로 곱게 감아주던 나의 소꿉동무들은 새신랑이 멋있다고 소곤거리며 부러워하였다. 깨끗하게 창호지를 새로 바르고 흙벽에 흘러내리는 황토가루를 말끔히 빗질한 작은 방에는 새로 풀을 먹여 빳빳한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친정엄니는 소반에 술 한 주전자와 약식 밤 대추를 접시에 담아 방으로 스르르 밀어 넣어 주셨다.

부끄러운 나에게 신랑은 잘살아 보자고 내게 잘해주겠다고 다짐하였다. 하늘의 별들이 그날의 우리처럼 부끄러움을 머금고 가만가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새벽에 친정엄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우리는 시댁으로 서둘러 길을 나섰다. 엄니와 눈이 마주치면 울음을 쏟아 낼 것 같아 뒤도 안돌아보고 오는 발걸음은 한 짐이나 되었다. 옥서리에서 버스를 타고 대천역으로 가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부산한 터미널에서 대전터미널 가는 버스를 간신히 잡아타고 옥천터미널에서 내렸다. 다시 하루에 한 번 운행하는 안남행 버스를 기다렸다. 다섯 번 버스를 갈아타고 저녁 무렵 하동정씨 집성촌인 시댁에 도착했다. 하루 온 종일 걸려 도착한 시댁. 긴 한숨을 토해낸 건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친정은 삼 백리 밖이라 이제 도농리 시댁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연둣빛 보리는 까시러웠다.

시댁은 돌담 집으로 밭에서 주운 돌 한 줄, 흙 한 줄 쌓아 올려 지은 것으로 그야말로 기어들어 갔다가 기어 나와야 했다. 땅이 조금 있었지만 요즘처럼 비료가 좋지 않아서 소출도 변변치 않아 빚만 가득했다. 나는 맏며느리로 기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입에 넣을 양식조차도 없었다. 먹어야 사니까 할 수 없이 부잣집에서 보리쌀 닷 말을 빌려서 곱장으로 내년 오륙 월에 열 말을 갚는 생활을 오래 했다. 시집오던 해 시아버지가 병환으로 별세하셨다. 시누이가 모두 4명이었는데 시누이 세 명은 이미 결혼하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두 분이 죽고 말았다. 시누이 한 명도 바로 시집을 갔다. 큰 시동생은 제금 내주고, 막내 시동생은 군대 복역 중에 사고로 전사하였다. 시어머니는 모신지 3년 만에 이웃면으로 시집간 작은 시누이 집에 놀러 가셔서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자초지종은 안사돈과 밤마실을 나섰다가 한길 깊이인 또랑에 놓인 쪽나무 다리를 건너다가 안사돈은 앞으로 빠지고, 시어머니는 뒤로 빠져서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 집안에 불운이 계속되었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꿋꿋하게 견뎌냈다. 난 그 와중에도 한숨보다는 억지로라도 웃으며 기운을 내려고 애썼다. 살아보니 불상사가 우리 집만을 옥죄는 것은 아니다. 다들 살면서 저마다의 불운과 불상사를 만난다. 잘 이겨내는 것이 우리 인생의 숙제기도하다.

순리대로 하늘에 맡기다.

일 년 후에 큰딸을 보았다. 그리고 감감무소식이다. 5년 후에 둘째 딸을 보았고 다시 6년 만에 아들을 보았다. 남편은 참으로 좋은 성격에 이해심도 많았고 우린 다정했다. 싸움도 거의 없었으며 불행하다고 눈물 흘린 적도 없다. 남편과 나는 그야말로 피 땀 흘려 열심히 일했다. 척박하고 볼품없이 작은 땅에서 변변치 않은 소출을 올렸고, 담배는 수매를 해주어서 담배농사에 10년 동안 매진하였다. 자식을 굶기지 않고 잘 가르치고 싶었던 그 소망 하나만 새겼다. 큰딸은 안내중학교를, 둘째 딸은 보은상고를 나와 둘 다 좋은 신랑 만났다. 막내아들은 보건전문대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에 교직원으로 취업해서 여적지 근무 중이다. 안정된 직장에서 근무하는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2마지기 다랭이 논은 식량이 안 될 정도라서 빚만 지고, 먼 밭 500평에 담배농사를 10년 정도 짓다가 누에농사로 전향하였다. 작은 밭떼기에 심은 뽕나무에서 뽕잎을 따서 큰 자루에 담아 소달구지에 싣고 와서 누에 밥을 먹이는 것이다. 집 앞마당에 하우스를 작게 지어서 잠실로 사용하고 방마다 누에를 키웠다. 누에는 뽕잎을 아주 잘 먹고 깨끗하게 온도 습도를 맞춰서 키우는데 담배농사보다 훨씬 수월했다. 4령 때 옥천 은성산업에서 고치를 수거해가면서 돈을 받았는데 거의 20년을 했다. 우린 그저 묵묵히 성실하게 일했다. 살림은 차츰 불어나고 걱정거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살 만 하다.

남편은 술은 안 했지만 담배농사 하면서 줄담배를 피웠고 기관지 천식이 심해져 8년 동안 집에서 콧줄을 끼다가 2016년 대전요양병원에 입원해서 20일 만에 먼 길을 가셨다. 3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나를 보더니 왜 왔냐고 물어서 당신 보러왔다는 대답을 하니 안심하고 그길로 영영 이별이다. 불쌍하고 더 잘해주지 못 했던 미안한 마음이 오늘 내 가슴 한 편을 흔든다. 되돌아보니 아무 것도 모를 때 아이들 낳고 가르치고 때맞춰 여윌 때 가장 행복했었다. 시집와 산지 62. 아들 6살 때 집에 친정오빠가 흙을 개어 덧붙여 종이문 발라 살고 있으니 여전히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지만 그건 자연의 순리일 뿐, 나의 영혼은 자유롭기만 하다. 곧 소풍 끝내고 그리운 내 님 만나러 갈 때까지 여전히 나는 하하호호 미소천사 쫑마리 여학생으로 살 것이며 훗날 웃는 모습 예뻤던 고운 할머니로 손주들이 기억해준다면 아, 내 인생은 아름다워라! 라고 어디선가 지그시 미소 짓겠지.

이연자 작가
이연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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