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 3학년 때 김현식과 같은 반…잘 웃고 발랄했던 현식이 생각나'
'구읍 저수지 밑에 큰 대문집은 우리집, 그 옆은 현식이네 집, 자주 어울렸다'
'갈포공장 운영했던 현식이네 할아버지…모시적삼 차려입고 신문 읽었다'
죽향초 제59회 동문 선옥희씨가 추억하는 김현식

1968년 옥천읍 옥각리로 봄소풍을 떠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첫째 줄 제일 오른쪽에 자리잡은 사람이 가수 김현식이다.둘째 줄에는 선옥희·김묘향씨가 보인다. 첫째줄 맨 왼쪽은 지난주 인터뷰를 진행한 윤선중씨다. 바로 옆 멋진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은 당시 이들의 담임이었던 금달순 선생님이다. 금달순 선생님 옆에 김현식과 절친했던 김홍민씨도 보인다. (사진제공: 선옥희)

[옥천 인물 발굴] 1968년 옥천읍 옥각리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장의 사진이 옥천신문으로 전해졌다.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죽향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가수 김현식과 그의 친구들. 당시 가수 김현식의 담임선생님이었던 금달순 선생님과 친구들이 옥각리로 봄소풍을 가서 남긴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을 제공해준 이는 선옥희(63, 서울시 관악구)씨다. 지난주 죽향초 59회 동문 윤선중(63, 서울시 송파구)씨와 연락이 닿은데 이어 선옥희씨와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선옥희씨가 한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오랜만에 들춰본 과거 기억에 젖어들어 사진첩을 넘겨 보던 중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다.

그가 기억하는 초등학생 김현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번 '옥천 인물 발굴 김현식편'에서는 선옥희씨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하려 한다. 이 이야기는 1966년, 그러니까 가수 김현식과 선옥희씨가 같은반이었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졸업 이후 서울서 우연히 마주한 1979년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어린시절 김현식의 모습. (사진 갈무리: SBS 스페셜 '전설의가객, 김현식을 노래하다')

■활발하고 잘 웃었던 초등학생 김현식

시골 애들은 말도 잘 안하고 얌전했던 것 같은데 유독 현식이는 그 안에서 정말 잘 웃고 발랄했다.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현식이와의 만남은 1966년.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인 것 같다. 바로 옆자리인가, 뒷자리인가 여하튼 상당히 가까이 앉아있어서 성적표가 나오면 서로 몰래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무척이나 잘 웃고 활발했던 현식이는 그 당시 유행하는 춤도 곧잘 추곤 했다. 하교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현식이가 그앞을 가로 막고 당시 유행했던 몽키춤을 '건들건들' 춘 기억이 있다. 내가 뭐라고 하니까 '옥천 깡패 아니냐'며 되레 나를 놀렸다. 뻐드랑니 이빨이 참 귀여웠던 것 같다.

당시 우리집은 구읍 저수지 밑에 큰 대문집으로 유명했다. 교육자 집안이었고, 오빠 4명과 언니 1명, 밑으로 남자·여자 동생 1명씩이 있었다. 8남매가 함께 살았다. 현식이네 집과는 20~30m 떨어진 거리(두세집 건너)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마당에서 놀았다.

낮에 현식이는 주로 우리 집에 있었다. 뒤뜰에서 같이 감도 땄다. 오빠들하고는 바둑인가 장기인가를 뒀던 것 같다. 어머니도 혼자있는 현식이가 안쓰러워서 그런지 잘 반겨 주셨다.

선중이가 말한 '죽향초 밴드부'는 故육영수여사님이 죽향초에 만들어 주셨다. 2학년 때 처음 생겼을 것이다. 현식이가 전학오기 전부터 밴드부가 있었다. 규모도 꽤 컸다. 40명 정도가 모여 아코디언, 실로폰, 캐스터네츠, 큰북, 작은북 등을 연주했다. 주로 강당에서 연습했고,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운동장으로 나와 행진 퍼포먼스를 했다. 주로 한 번 밴드부에 들면 쭉 이어서 했는데 맡은 악기는 바뀌곤 했다. 현식이는 작은북을, 선중이는 지휘를, 나는 리코더를 불거나 피아노를 쳤다.

■모시 적삼 차려입고 신문 읽던 현식이네 할아버지

당시 내 기억으로 현식이는 할아버지가 키우셨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 정도 서울서 내려왔던가 그랬다. 방학 때면 현식이네 형제들도 간혹 놀러 온 것 같다. 그래서 더 외로움을 많이 탔고, 우리 집에도 많이 놀러 온 게 아닐까 싶다.

현식이네 할아버지는 구읍 사거리에 있는 갈포공장을 운영했다. 이 곳 마당에서 현식이 따라 들어가서 제기도 차고, 자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을 했다.

현식이네 할아버지는 풍채가 상당히 좋으셨다. 항상 모시적삼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갈포공장에 있는 쇼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곤 했다. 그 당시 그런 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선명하게 기억난다.

현식이가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현식이가 살던 집은 이후 선중이네가 사고, 그다음은 우리 오빠 선환길이 다시 샀다. 당시 옥천실고, 옥천여중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환길 오빠가 이 집에서 몇년 살다가 대전으로 집을 옮기며서 다시 팔았다고 들었다.

선옥희씨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제공: 선옥희)

■서울 서초구서 우연히 다시 만난 가수 김현식

현식이가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연락이 안 됐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됐고, 대한투자신탁 반포지점에서 일했다. 당시 우리 언니 선명순은 남산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초구에 있는 구반포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79년 즈음인가 우연히 TV에서 현식이가 그룹으로 나오는 걸 본 적이 있다. 가수가 됐거니 싶었는데, 정말 가까이에 살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명순 언니가 한날은 퇴근하다가 누가 ‘누나’ 소리를 하길래 뒤돌아 봤더니 현식이었다. 현식이도 우리가 살고 있는 구반포아파트 바로 옆동에 살았던 것이다. 

명순 언니와 전화 번호를 받아서 나에게 알려줬다. 신기한 마음에 연락을 해 당시 구반포에서 유명했던 찻집 ‘돌다방’에서 차 한잔 마시고 돌아왔다. 현식이는 우리집을 '저수지 밑 큰 대문집 딸'이라고 기억하더라. 얘기를 나눠보니 나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고 우리 언니랑 오빠랑 자주 놀았던 게 생각난다더라. 

현식이는 그 당시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다. 주로 밤에 라이브 카페 같은 데서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예 생활패턴이 우리랑은 달랐다. 우리가 퇴근할 때 현식이는 카페로 출근을 했고, 출근할 때는 퇴근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많이 만나지는 못했고 종종 전화통화를 했다.

현식이는 종종 대전 홍명상가 뒤편에 있는 카페에서 라이브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에는 대전에가서 라이브를 하고, 일요일에는 서울로 돌아온다고 했다. 언제 한 번 들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는 연락을 거의 못했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에게 가수 김현식이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을 간혹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TV에서 김현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보고 나에게 알려줬다. 그렇게 마지막이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식이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초등학교 때는 잘 몰랐다. 다만 내 기억 속에 현식이는 활달하고 거침이 없는, 서글서글하게 잘 웃는 친구였다.

김현식 4집 앨범사진 (사진 갈무리: 지니뮤직)

가수 김현식의 4집 앨범은 1988년 10월 세상에 선보여진다. 해당 앨범을 내기 약 1년 전인 1987년 10월, 가요계에는 대대적인 마약 단속 바람이 불었다. 이때 김현식도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다. 아들을 걱정했던 어머니 류진희씨의 신고로 말이다. 집행유예를 풀려난 김현식은 다시는 대마초에 손대지 않겠다며 머리를 삭발하고, 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는다. 이후 1988년 2월 다시 대중들 앞에서 섰고, 10월 4집 앨범을 발매한다. 평론가들은 김현식의 4집 앨범을 호소력이 한층 더 강해진, 외로움의 색채가 짙게 묻어났다고 평가한다. 김현식의 곱던 미성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바뀌어간 시점이기도 하다. 김현식은 앨범 발매 해에 가수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으로 꼽히던 골든디스크 상을 받는다. 

▶김현식 4집 다시보기

1. 언제나 그대 내곁에(응답하라 1988 삽입곡)

2. 여름밤의 꿈

3. 한밤중에

4. 이제는

5. 우리네 인생

6. 사랑할 수 없어

7. (타이틀) 그대 내품에

8. 기다리겠소

9. 한국사람

10. 우리 처음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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