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홍경화씨 인터뷰(3)

'남편 윤중호'이기 전에 먼저 '아들 윤중호'였고, 그래서 언젠가는 그가 옥천으로 가게 될 거라 짐작했다. 어린시절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살게 된 어머니 박유순씨와 윤중호씨 사이는 다른 모자지간과 비견하지 못할 정도로 애틋했다.

"윤중호에게 '우리 엄니'는 거의 신같은 존재였어요. 결혼하고 나서 윤중호에게 한번 '진주반지 가지고 싶어'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우리 엄니 반지도 아직 못해줬는데...'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뒤로는 농담으로라도 뭐 가지고 싶단 이야기를 안 했어요."

윤중호씨의 말이 섭섭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랑 그 사람이 떨어져 살았잖아요. 한번은 중학교 1학년 때 그 사람 생일에 어머니가 작은 밥통에 닭을 삶아서 학교로 찾아왔는데, 닭국 열기 때문인지 밥통이 열리지가 않는 거예요. 학교 앞 가게에서 드라이버도 써보고 망치도 써봤는데 밥통은 안 열리고, 점심시간 끝났다는 사이렌은 왱왱 울리고... 그걸 못 먹여서 '엄니'가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두 사람 사이 그 애틋함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언젠가 서울 생활 접고 이원 내려가 어머니 모시고 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윤중호도 종종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그 사람은 좋아하는 텃밭을 가꾸고, 전 북카페같은 걸 운영하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은 몰랐죠." (홍경화,58,경기도 고양시)

윤중호 시인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해인사 미타원에 봉안됐다. 지난달 18일은 시인의 15주기 기일이었다. 누군가 놓고 간 국화꽃이 보인다. 19일 촬영.

■감꽃처럼 툭 떨어진 몸 허물 앞에서 

시인은 4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췌장암이었다. 모기떼가 극성스러웠던 한 여름, 투병생활은 두 달이 채 되지 못했다. 시인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늘 사람에 붙잡히는 윤자(윤중호)에게 "사람도 좀 끊을 것은 끊고 네 시간 좀 가져라"하면 "지금은 아니다"며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할 때이다. 그것이 끝나면 떠날 것이다"라고 마치 정해진 업보처럼 어찌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끝날 것인지는 오십 넘겨 얼마 안 있어라고도 했고, 근래에는 그때가 멀지 않았다 정도로 말했다. 그러면 시골로 내려가서 자력 농사지어 서울사람들과도 나누어 먹고, 마음 편하게 수행을 해나갈 것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나도 좀 데려가 달라고 말했고 윤자는 그러쥬, 그러면 자그마한 공동체가 차츰 만들어지지 않겠냐고 말했다". 윤재철, '윤중호를 말하다, 본동에 내리는비―윤자소전(尹子小傳)' 중

어머니 곁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을 꿈에 그렸지만 시인은 농사가 아닌 췌장암 판정을 받고 요양을 위해 옥천을 찾게 된다. 누이가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들어간 옥천읍 삼청리 대림선원 적묵당에 잠시 거처했다. 그런데 좀처럼 요양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알음알음 어떻게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매시간 집이 붐볐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홍경화씨가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기까지 했을까.

"어쩌면 윤중호가 매일같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면서, 이야기가 속에 쌓이고 쌓여서 그게 병이 된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어요.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장남이잖아요. 부모님이 헤어지고 또 새어머니가 생기고,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새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동생들도 챙겨야 하고, 항상 참고 받아주다보니 자기 감정을 내세울 수 없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어디까지나제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끌어안고 살면서 정작 자기 마음은 잘 보여주지 못했던 거 같거든요.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성숙해졌던 거 같아요. 그 사람이 깔깔 웃으면서 유쾌해했던 모습을 떠올려도 전 그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아요. 그 사람 속에 얼마나 많은 말과 감정들이 꾹꾹 쌓여 있을까. 그게 병이 됐다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시인은 마지막까지 행복해했다. 윤중호씨는 투병생활 중에도, 떠나는 날에도 '난 참 행복한 놈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홍경화씨도 동의한다. "윤중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에요." 윤중호씨가 떠난 지 올해로 15년이 지났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경화씨가 어떤 공백 없이 이다지도 윤중호씨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홍경화씨가 경기도 일산에서 운영하는 남도한정식집 '여자만'

홍경화씨는 경기도 일산에서 남도 한정식집 '여자만'을 운영하고 있다. 윤중호씨가 떠나고 1년은 그렇다치는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들은 가게를 찾아오고 있다. '나 또 왔어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그때 윤중호가 이랬다지, 저랬다지, 기억나나?' 이야기하며 그가 살아있었을 때와 똑같이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를 떨고 간다. 홍경화씨를 한바탕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덕분에 윤중호씨와의 일들을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한다. 집에 돌아가면 그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올해는 등나무꽃도 스쳐갔네/자글자글 눈으로 웃으며/'헉' 숨이 멎어 한참을 바라보던 동네 어귀 등나무꽃.//올해는 금강가를 거닐지도 못했네/반짝이는 은피라미떼 눈 맞추며/며칠씩 걷던 금강 원둑.//올해는 새벽 산길에 핀/쑥부쟁이 따라 건들대지 못했네.//우리 엄니, 부러진 어깨뼈 더디 아물어……" 시 '올해는'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은 아쉽기만 하다. 어머니는 대림선원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멀찌감치 아들의 야윈 얼굴만 말없이 바라보다 나직하게 떠났다. 그의 얼굴을 못 봐서, 또는 그의 얼굴을 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한 사람은 얼마나 많았나. 시인이 고향을 사랑했던 만큼 우리에게는 또 얼마나 아픈 일인가.

"그런데 '죽'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글자일까/윤중호 석 자 뒤엔 아무래도 낯설다/'지읒'이 '기역'에 닿기까지/길가엔 어허이 에하 상두 소리 울릴까/저 산 모양 '죽' 자 날망에는/고봉밥처럼 황토 봉분 외로울까/'지읒'과 '욱'사이 나지막한 양지녘/고통도 시름도 이제 내려놓고/가벼이 문지방 넘어가는 넋은 있으리/'주'의 복판 웅덩이엔/차마 못다한 말들이 썩어 고여 우울하리/우울하여 마침내 긴 주름 아득한 '지읒'이겠네/'주'와 '기역' 사이 어느 고샅에/산동네 자취의 날 있으리/눈물 훔치며 돌아나오던 옛동네도 숨어 있으리/그 고샅 끝에서 새 옷 갈아입고/쌀 세 알 물고/다락 같은 일주문 '기역' 자 문턱에 덜컥 걸려 넘어지면/그대 문득 저승이리/이승엔 왈칵 쏟는 뜨거운 국솥같이 통곡 있으리/기어이 일어나버린 저 '죽' 자의 식은 정강이를 붙잡고/감꽃처럼 툭 떨어진 몸 허물 앞에서/어머니는 우신다/그저 우신다" 김사인, 시 '윤중호 죽다'

윤중호 시인의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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