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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벌초
  • 옥천닷컴
  • 승인 2019.09.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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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옥 (시인, 옥천군문화관광해설사)

매미 소리 목청 높여 울어대고 따갑게 내리쬐던 햇볕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어느새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스르륵 가을의 문을 연다. 들녘에는 황금물결로 가득하고 풍요로운 가을이 슬쩍 내려앉는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윙윙윙'가쁜 숨을 몰아쉬는 예초기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계절도 벌써 처서를 건너 백로에 와 있다. 밤낮의 기온도 완연히 다르고 추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예초기 손질에 여념이 없다. 기름을 준비하고 작동도 해보고 벌초 준비를 하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아버님께서는 수돗가에 서너 개의 낫과 숫돌을 준비하고 앉았다.'쓱싹쓰악싹쓰싹'정성을 들여가며 날이 서도록 낫의 날에 물을 뿌리며 한참을 갈았다. 

가을이 익어갈 때면, 남편과 우리 가족들은 연례행사처럼, 점심과 간식을 싸서 고향의 선산으로 벌초를 위해 출발했다.   

들길을 지나 산길 깊숙이 들어설수록 길이 없었다. 예전처럼 산에 나무도 하고 자주 다니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남편은 준비해온 낫으로 묵은 나무의 잔가지를 치며 앞장을 섰다. 일 년 내내 웃자라 엉켜있는 가시나무 풀숲을 헤치고 길을 냈다. 

지난 그 시절 부모님과 같이했던 벌초 길은, 우리 집에서 가장 어른이었던 아버님은 남편이 앞장을 선다고 해도 한사코 선두에 섰다. 아마도 아들에 대한 배려와 지리적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이었으리라. 그때 그길로 낫 대신에 예초기를 메고 남편이 길을 내고, 아들과 함께 가고 있다.  

농사일을 몰랐던 나는 가끔씩 하는 시골 일이 재미도 있고, 나름 좋았다. 

아버님과 남편은 낫질을 하고 어머님과 나는 갈퀴질을 하였다. 가을 햇살이 바삭바삭 거리는 한낮은 나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게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잠시 쉴 때 풀냄새가 섞여 스치는 바람의 향기는 풋풋하다 못해 달디 달았었다. 

온 산이 여기저기에서 들썩거리고 곤충들과 날파리들이 놀라 이리저리 뛰고 달아난다. 예초기의 칼날이 빙그르르 돌더니 "왱에엥왱왱" 여름 내내 웃자란 방초들이 굉음소리에 놀라 퍼렇게 주저앉는다. 낫 대신 예초기가 순식간에 웃자란 근심도 걸신처럼 먹어치운다. 언제나 발치에 두고 싶었던 부모님들, 안부를 세세히 여쭙는 어설픈 몸짓으로 온종일 가을 햇볕아래 갈퀴질을 했다. 아들과 아들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 무덤에 돋은 풀과 칡넝쿨, 쑥부쟁이 군 때를 걷어내었다.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절을 하시던 할머니처럼 나는 연신 허리를 굽혔다. 

마음속으로 자손들의 안위와 평안을, 또한 출세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나가는 바람 한 자락을 끊어 소지도 올렸다. 

어머니의 주저앉은 젖가슴처럼 늙은 봉분들이 세월을 말하는 듯하다. 남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내년 한식 때는 사초 좀 해야겠어."고향 지척에 살고 있는 탓으로 늘 아버지가 그래왔듯이 의무이듯 혼자서 묵묵히 선산을 보살펴왔다. 

잡초들은 뽑아도, 뽑아도 잡념처럼 고개를 들고 돋아난다. 쇠심줄 같은 칡넝쿨과 따끔따끔한 청미래 넝쿨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 여기가 내 자리라고 거세게 달려들었다. 봉분 위에 난 잡초를 뽑으며 생전에 부모님의 우묵했던 얼굴을 만지듯 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무덤가에 또 하나의 풀 무덤을 만들어 놓고 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쪽빛처럼 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또 하나의 봉분을 만들고 있었다.

백지장처럼 시린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시다. 건 듯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불어왔다. 물기 없는 나뭇잎들이 힘없이 흔들리고, 바람에 실려 오는 예전의 그 풋풋한 풀 향기가 오늘도 달콤하게 스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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