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 선수로 시작해 휴대폰 매장을 차리기까지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나’로서 살기 위한 진휘용씨만의 돌파구

새로 휴대폰을 개통하는 손님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휘용씨 

 젊어서 지역에 살기는 쉽지 않다. '누구의 아들, 딸'로 기억되는 건 사실 부담이다. 그 평가가 좋든 나쁘든 어느 쪽이건 간에 부모의 평판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것은 홀로 크는 데 '장벽'으로 작동한다. 지역의 젊은 친구들이 지역을 떠나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행동거지 하나, 말 하나에 '시간차'를 두고 '커브볼'로 들어오는 소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떠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휘용(31)씨는 달랐다. 무거운 돌직구로 승부를 걸었다. 더구나 사무관 출신 퇴직공무원인 아버지(진유환)의 사업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 사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공무원이 되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바람은 기대로 접수하면서도 그는 '꼭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 각자의 재능으로 사회에 기여한다고 생각해요. 나쁜 일만 아니면,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을 하면서 공무원은 공무를 하면서 각자의 일에 책임과 역할을 다할 때 지역 사회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하거든요. 부모님은 공무원이 되길 간절히 원했지만, 저는 제가 원하는 옷을 입고 싶었어요. 그래서 부모님 도움 받지 않고 어렵더라도 자수성가하고 싶었습니다. 오래 끈질기게 하면 알아줄거라 믿었지요." 그런 믿음은 사실 통했다. 그는 속된 말로 '아버지 이름을 팔지 않았다'. 부모님 이름을 들먹이면서 영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온전한 한 사람의 진휘용으로서 평가를 받고 싶었다. 서울에서의 다양한 사업 경험을 해보고 대전과 옥천에서 휴대폰 매장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사업자를 고민할 때도 그는 도움받지 않고 '자립의 꿈'을 키웠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여러 유산 중에 진휘용씨가 취한 것은 지역사회에 늘 봉사하라는 그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대성적십자봉사회도 가입해 사무국장을 맡았고 옥천읍 자율방범대 사무차장도, 옥천군배드민턴연합회 사무차장도 그렇게 맡았다. 궂은 일이라도 해야할 일이면 열일 제쳐놓고 함께 했다. 단체 들어가봐야 막내로 심부름 하는 일이 많아져 힘들텐데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옥천에 살면서 더불어 사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듯 보였다. 떠날 법도 한데 떠나지 않는 청년, 오히려 깊이있게 뿌리 내린 청년 진휘용, 그는 최근에는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스마트폰 강사를 자처하면서 노인들한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틈만 나면 무엇이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자립의 기틀을 다지는 '1등 휴대폰 가게'를 운영하는 옥천 청년 진휘용을 만나봤다. 

 어렸을 때는 유도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유독 몸집이 커서 시작하게 된 유도 선수 생활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합숙도 하고, 전지훈련도 다니며 열심히 노력하여 전국체전에서 은메달도 땄다. 대학 또한 선수 경력을 살려 경운대학교 경호학과에 입학했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운동선수 생활을 했던 탓일까. 골반은 군대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져 있었다. ‘운동을 계속하긴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오랜 기간 친구와도 같았던 일을 떼어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무기력해질 수는 없었다. 다니던 경호학과를 자퇴하고 편입을 준비해 중부대학교 경영학과로 다시 입학했다. 운동을 못 하게 되며 차선책으로 정한 전공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대학교 4학년은 취업계를 내며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갖게 된 첫 직장이 대전복합버스터미널 앞 삼성디지털프라자였다. 1층 휴대폰 코너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새로 생긴다는 옥천 분점에 자원하여 오게 됐다. 하지만 판매량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기업은 경영 방침에 따라 휴대폰 코너를 빼기로 했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또 다른 선택을 했다. 삼성전자에 사표를 쓰고, 원래 휴대폰 코너가 있던 자리에 개인사업자를 냈다. 그렇게 1년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디지털프라자에서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1등휴대폰’을 운영하고 있다.

매장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다양한 휴대폰 케이스가 정돈되어 걸려있다.

옥천에서 홀로서기


휘용씨는 대전에서 대학 생활과 직장생활을 했고, 서울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 수산물 경매장도 기웃거려 보고 택배회사 등 이곳저곳에서 장사하는 법도 배웠다. 도시를 경험할 대로 경험한 그가 보는 옥천은 어떨까.

“지역 청년들의 모습은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많은 청년이 개인의 행복을 찾아 고향을 떠나고, 고향에 사는 청년에게는 또래가 없죠. 저도 주로 형님들과 자주 만나요. 제가 서른한 살인데, 바로 위가 마흔 살이에요. 고등학교 동창들도 남아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요. 친동생도 서울로 갔다가 결국은 중국까지 갔고, 누나도 제주도로 떠났어요. 지역에 있다는 것 자체로 답답함을 느끼는 청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게다가 옥천은 인문계열 공부한 친구들이 취직할 수 있는 일자리조차 부족하니, 능력 있는 친구들은 이미 다 타지로 떠났죠.” "남아있는 청년들은 대부분 부모들의 유산을 물려받아 사업을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에요. 출발점이 다른 거죠. 어떤 사람은 정말 아무 것 없는 바닥에서 시작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미 부모가 상당부분 일궈놓은 물적 유산과 관계의 유산 속에서 출발하니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죠. 그런데서 오는 괴리감도 있어요. 저는 그래서 물적 도움도 관계적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서려고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혼자 힘으로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누구 아들 진휘용이 아니라 진휘용 그 자체로 인정받고 싶었죠." 그의 지론이 이어진다. 

 청년은 없고, 있는 사람마저도 자수성가하기에는 참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휘용씨는 이곳에서 기회를 직접 만들고자 결심했다. 

책장에는 경영학 서적이 많이 꽂혀있다. 휘용씨가 학생 때 읽던 것인데, 초심을 다잡고자 매장에 두었다고 한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한 부모님은 아들이 장사하려고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에야 부모님이 퇴직하고 사업을 많이 도와주지만, 그전에는 늘 ‘공무원 해라’라고 했다. “공무원 해야 잘 나고, 휴대폰 팔면 못 나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성향 따라 공무원 하는 사람 있으면 자영업 하는 사람도 있는 거죠. ‘뭘 하는지’보다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부모님의 요구와는 다른 ‘저’만의 영역을 구축했어요. 부모님에게 흡수되는 것보다, 제 영역이 생기는 것이 부모님에게도 도움이 배가 되는 일이잖아요.”

처음엔 부모님의 도움 없이 혼자 사업을 시작하려니 힘든 점이 참 많았다. 부모님이 지지해주고, 도와주면 좋았으련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자영업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긴 것 같다. 실제로 금전적인 지원도 단 한 푼도 안 해주셨다. 그래서 인테리어도 업체에 맡길 수가 없어서 직접 발품을 팔며 알아보러 다녔다. 매장 내의 책장, 테이블, 인테리어 소품 등 모두 돈 버는 대로 조금씩 사서 직접 꾸민 것이다. 

"부모님께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 했지만, 부모님처럼 제 사업을 많이 도와주신 분이 계세요. 지금은 안남면에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계신데, 애플통신 주진희 사장님께 참 감사해요. 사업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 꼼꼼히 알려주시고, 가게에 있는 집기도 모두 물려주셨어요. 주진희 사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1등휴대폰'은 지금까지 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자율방범대 순찰 활동 사진. 
저소득층 빨래봉사중인 휘용씨.

지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


매장 벽에는 그의 지역사회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일요일에 주로 취미생활을 즐기는데, 그마저도 너무 바쁘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휘용씨는 작년까지만 해도 옥천군 배드민턴협회 사무차장, 옥천읍자율방범대 사무차장, 대성적십자 사무국장 등 3개의 직책을 맡았다. 일만 해도 바쁜데 취미 활동 하는 단체에서 직책을 3개나 소화해야 했으니. 올해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자율방범대 사무차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려놓았다고 한다.

활동뿐만 아니라 봉사원 기본 교육도 철저하게 받는다.
몸은 힘들지만 봉사원들과 함께 웃으며 봉사중인 휘용씨.

봉사활동은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꾸준하게 봉사활동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봉사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적십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사랑의 무료급식’, ‘사랑의 점심 나누기’ 등을 통해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복지관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지난 8월에는 어르신 서른 분을 대상으로 4회차분의 스마트폰 기초 교육 강의를 하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에 대해서 어렵고 복잡한 기능을 궁금해하시는 게 아니에요. 질문하시는 걸 들어보면 굉장히 쉽고 단순한 것들이거든요. 차근차근 알려드리니 열정을 가지고 잘 따라와 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고 뿌듯한 마음이 든 시간이었어요.”

복지관에서 스마트폰 기초 교육 강의를 하고 있는 휘용씨의 모습.

이렇듯 휘용씨에게 휴대폰은 단순히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 아니다. 가격 경쟁이 유독 치열해 보이는 휴대폰 시장에서 그는 정직하게 장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휴대폰의 기깃값은 정해져 있는데, 가끔 이익을 더 남기려고 고객의 사용량과 상관없이 고가의 요금제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아는 사람을 통해서 휴대폰을 바꾸려고 해서, 저도 제 이름을 많이 알리고 있습니다. 모든 고객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 믿고 찾아주셔도 좋습니다.” 

누군가는 그가 운영하는 ‘1등휴대폰’ 간판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가게를 열자마자 1등 하려고 하면 쓰나.’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두고 보십시오. 이름만 1등이 아니라, 실적으로도 1등 하는 날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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