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문화관 ‘충북연고 작고작가 예술과 정신’ 기획전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원면 대흥리 출신 박석호 화백
작가의 미적 고뇌와 작업 과정 이해하는 기회

 박석호 화백. 이원면 대흥리가 고향이지만, 고향에서는 외려 기억하지 못하는. 서양화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화가이지만, 화단의 야인으로 지내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 못한, 어찌 보면 비운의, 모순의 화가이다. 옥천은 서양화의 한원 박석호, 동양화의 심향 박승무, 추상화의 하동철 등 거명하면 알 만한 지역 출신 작가들이 있지만, 정작 이들을 기념하는 미술관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홍익대 미대 교수직을 사퇴한 이후 1996년 예술의 전당 근대미술작가 재조명전에서도 첫번째 주자가 될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그의 기획전. 옥천이 아닌 청주에서, 2015년 단체전에 이어 올해는 개인전으로 찾아왔다. 바다 하나 볼 수 없었던 옥천에서 바다를 동경하며 그렸던 박석호 화백, 그는 여전히 꿈에 그리던 고향에 둥지를 틀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올해가 박석호 화백 탄생 100주년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옥천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박석호 화백을 기리는 미술관이 얼른 고향에도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8월27일 충북문화관에서 열린 '완전한 미완'이라는 주제의 박석호 전시회를 다녀왔다. 

 박석호 화백은 한국 미술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우리나라 70년대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다. 

 청주시 소재의 충북문화관에서는 2013년부터 충청북도에 연고를 둔 작고작가를 소개하는 기획전시를 계속해왔다. 그로써 충북의 예술인들이 주목받고 사랑받아 자연스럽게 지역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고장 출신인 박석호 화백의 주요작품 전시 역시 2015년에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충북문화관에서는 2019년 현재 또다시 박석호 화백의 전시를 열었다. 이번의 전시가 지난번과 다른 점은, ‘미완성작’들이 주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미완성작을 전시한다고? 얼핏 이상하게 들린다. 심지어는 기획전의 제목이 『완전한 미완』. 이보다 더 모순적일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완전한 미완』의 모순은 우리에게 어떤 강한 느낌을 선사한다.

박석호 화백은 같은 대상을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여러 번 그렸다.

 ‘미완’이 왜 ‘완전’하다는 것인가? 『완전한 미완』에서 전시된 박석호 화백의 작품들을 보면 같은 대상, 같은 모델을 같은 자세로 그린 것이 여러 점 있다. 목탄으로, 파스텔로, 수채, 유채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바꿔가며 사용한 것들이다. 충북문화관의 손명희 학예사는 “즉흥적인 드로잉부터 유화로 옮겨 작품을 완성해가는 모든 과정의 하나하나가 완성된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어디를 얼만큼 손대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어서 “이번 전시는 박석호 화백의 작업 과정에서의 정신적 흐름, 미적 고뇌, 그것들을 따라가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전했다.

충북문화관의 손명희 학예사.
충북문화관의 손명희 학예사.

 그래서 연대순으로 작가의 삶을 따라가거나, 카테고리로 엮는 연출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 사람의 발자국으로 큰 오솔길 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도와 발걸음들이 그 길 위를 지나갔을지를 만나보도록 했다. 크고 작은 길들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작가의 삶과 예술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석호 화백이 그린 성곽.

 박석호 화백은 1919년 7월9일, 이원면 대흥리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6년 앙데팡당 미술협회전에서 최고상을 받고, 그 뒤 1949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1기생으로 들어가 졸업과 동시에 조교 일을 맡았다. 1961년에 조교수로 임명되고 5년만에 학교의 부당한 인사결정에 항의하며 동료들과 함께 교수직을 사퇴했다.

박석호 화백이 그린 여성 누드. 같은 모델을 같은 자세로 여러 번 그렸다.
박석호 화백이 그린 여성 누드. 같은 모델을 같은 자세로 여러 번 그렸다.

 50년대에는 주로 인물을 그렸던 박석호 화백은 60~70년대 들어 불상이나 부조 등의 한국적 조형요소와 정체성을 탐구한다. 70년대 중반부터는 ‘배의 작가’, ‘항구의 작가’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바다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박석호 화백이 그린 불상.
박석호 화백이 그린 불상.
손명희 학예사는 "앞의 사람과 그가 끄는 그물이 뒤쪽의 커다란 배만큼이나 돋보인다. 어민들의 삶의 무게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바다’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소재가 아니다. 청회색의 어두운 빛깔로 덮인 화면은 서민 생활상을 애환을 담은 것. 어촌, 포구, 배, 바닷가, 어느 하나 대상을 단순히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니다. 박석호 화백의 지성과 감성이 대상의 모습을 잠시 빌려왔을 뿐이다. “자연의 대상은 소재로 빌려온다는 것일 뿐, 결코 그 자체를 그린다고 말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박석호 화백의 말이 벽 한편에 쓰여 있다.
박석호 화백의 드로잉 흔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석호 화백의 드로잉 흔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20여 년 간 역촌동 허름한 화실에서 항상 자리를 지켰다. 그림을 그릴 곳만 있다면 평생토록 쉬지 않고 그렸다. 그래서 드로잉 작업량이 어마어마하다. 후학들에게도 데생을 통해 다지는 기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70년대 개인전에서도 데생 전시가 많았을 정도. 하지만 이렇게 데생을 강조했던 그가 작품에서는 굉장히 해체된 선을 구사했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마티에르(화면의 질감. 소재나 용법에 따라 창출한 표면 효과)를 얹고, 또 얹었다고 한다. 박석호 화백은 그 과정을 ‘파괴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아들인 박래헌씨의 회상에 따르면, ‘파괴하고 또 파괴하다 보면 똑같은 그림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박석호 화백의 손주가 태어났을 때 그린 그림들이다.

 그러다 보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생을 두고 작업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작품이 많다. 여태껏 공개되지 않고 꼭꼭 숨어서, 시간의 흐름만을 맞아온 ‘완전한’ 작품들. 오늘에 와서야 우리는, 박석호 화백의 ‘완전한 미완’을 따라가는 것이다.

벽 한편에 박석호 화백의 작품 도판목록이 있었다.

 옥천사람인 박석호 화백. 서울에서, 청주에서 주목하고 재조명해 그를 기리고 있는 데 반해, 정작 그의 고향인 옥천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찾기 힘들다. 그가 옥천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은커녕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지용 시인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천양지차다. 아마도 미술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문학계에보다 덜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박석호 화백을 비롯한 우리고장 출신의 예술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뜻을 기리면, 또다른 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날 것이다. 그로써 우리고장에 예술의 꽃이 활짝 피어나길 바란다.

박석호 화백의 전시회 도록들이다.
박석호 화백의 전시회 도록들이다.
박석호 화백의 생전 아뜰리에 사진이다.
박석호 화백의 생전 아뜰리에 사진이다.
벽 한편에 '완전한 미완' 전시회 포스터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박석호 화백은 하나의 주제로 여러 번의 새로운 붓질을 시도했다.
박석호 화백은 하나의 주제로 여러 번의 새로운 붓질을 시도했다.
박석호 화백은 하나의 주제로 여러 번의 새로운 붓질을 시도했다.
박석호 화백은 하나의 주제로 여러 번의 새로운 붓질을 시도했다.
박석호 화백은 하나의 주제로 여러 번의 새로운 붓질을 시도했다.
박석호 화백은 하나의 주제로 여러 번의 새로운 붓질을 시도했다.
박석호 화백은 6~70년대에 부조, 불상, 탑 등 우리 전통의 것에 심취해 많은 작품을 그렸다.
'완전한 미완' 전시회 중인 충북문화관 숲속갤러리의 전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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