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숙 작가(옥천읍 문정리)

안효숙 작가
안효숙 작가

[기고]

지금은 우기 중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햇볕이 쨍쨍 내려쬐더니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깔리더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를 피하려 가게 앞 처마 아래로 로 몸을 숨긴다.

비를 피하려고 서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공주장이었다.

장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천둥 번개가 요란하기를 넘쳐 무지막지하게 치기 시작했다.

몸을 숨기고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올 때는 어찌 왔는데 돌아갈 기름값이 없었던지라 빗속이 아니라 전쟁이 났다 해도 장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파라솔을 펴고 차에서 보리쌀 자루를 내려놓는데 (그 무렵 화장품 파는 것으로는 매상이 오르지 않아 대체품으로 보리쌀을 팔았다.) 갑자기 하늘이 구멍 난 듯 비가 쏟아졌다.

전봇대 꼭대기에서도 불이 번쩍번쩍하는 게 물동이로 쏟아붓는 것 같은 게 너무 무서워 전을 펴던 것을 멈추고 비를 피하느라 약국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이미 비를 피하던 행인들이 오늘 같은 날 뭐 하러 나왔느냐고 한마디씩 하는데 ... 그중 키가 아주 작은 할머니가 내던져진 자루를 가리키며 저 자루는 비에 맞아도 상관없는 거냐고 물었다.

가지고 있는 전부를 털어 새벽에 중앙시장에 가서 보리쌀 세 자루를 사가지고 왔는데 나만 살겠다고 보리쌀 자루를 집어던지고 정신없이 숨은 꼴이라니...

순식간에 쏟아진 비가 넘쳐나 보도블록 위에서도 발목까지 채였으니 주인이 버린 보리쌀 자루는 이미 물에 푹 잠겨버리고 말았다.

할머니의 말 끝에 처마 밑에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모두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일제히 시선이 내게 닿았다.

파라솔을 칠 때 쏟아진 비로 입고 있는 옷은 흠뻑 젖어 물이 뚝뚝 흘러내렸고 바닥에 팽개쳐진 화장품과 보리쌀 자루는 참으로 비루하고 보잘것없이 참담한 내 모습인듯했다.

가슴은 꽉 막혀왔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젖어도 괜찮아요... '했는데 바로 옆이 택시 승강장이었던지라 도착서부터 줄곧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기사는 그 말을 들었는지 차 창문을 내리더니 '괜찮기는.... 보리쌀 같은데 아줌마 오늘 본전도 못 찾고 집에 가겠네.' 하는데 그만 참았던 설움이 차올랐다.

금방 쏟아질 듯한 눈물을 꾹꾹 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가 그치기만 간절히 기다렸다.  

정오가 돼 갈 무렵 비가 그치더니 올려다 본 하늘에는 그림처럼 무지개가 떠올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와아... 예쁘다. 하며 감탄사를 내뱉을 때 몸과 마음이 젖은 채 남의 처마 밑에 서 있던 나는 내 안에 무지개가 차오르는 것처럼 더없이 마음이 환하고 기뻤다.

축축해진 바지를 걷어올리고 다시 전을 펴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비에 젖은 것들을 닦아내고 또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리고...?그 많은 걱정을 잊은 채. 정말 예쁘다... 하고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치니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어디 숨어 있다 나오는 것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할머니들이 비가 오는데도 구루무 장사는 나왔네. 하며 내 전 앞에서 멈추어 화장품을 하나, 두 개 사 가셨다. 하나 팔면 세어보고 또 하나 팔면 또 세어보고 다시 세어보고 또 세어보니 기름값은 넘어섰고 그제서야 집에는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불안함이 사라졌다.

그 편함도 잠시 무지개가 사라지고 다시 깜깜해지더니 굵은 장대비가 아침처럼 쏟아져 물건을 던지다시피 차에 집어넣고 나니 그제서야 아침에 우산도 챙겨가지 못한 아이들이 이 빗속을 어찌 뚫고 집으로 돌아왔으려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기 뚝뚝 떨어지는 몸을 차 안으로 구겨 넣고 출발하려 하는데 친정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쳐다보는데 끊이지 않고 오래도록 울리는 전화를 받지는 못하고 갑자기 서러워져 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아파 울기를 멈췄다.

듣는 사람 보는 사람 없이 실컷 울고 나니 조금은 속이 편해졌다.

집에 도착해 물기 빠진 보리쌀을 방바닥에 펴놓고 몇 날을 말려 보리밥도 해먹고 아는 장꾼들과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장마철이면 떠오른다.  

-

이제는 울 일은 좀처럼 없다.

이보다 더 나빠질 일이 있을까.

거리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쳐 남의 집 처마 밑에 몸을 숨기며 가게 주인 눈치를 보았던 지난 시절은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처마 밑의 가게 주인이 되었다.

가게 주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한쪽 손에는 가게 안에 놓을 꽃을 들고 한쪽 손에는 가게에서 읽을 책과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그런 풍경을 그려보고는 했다.

요즈음 그렇게 출근하고 있다.

비가 오면 가게 안에 앉아 치열하게 살아가던 젊은 날의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슬픈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이 용감했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살아가던 나의 젊은 날, 언젠가 친정 언니가 살아도 살아도 참 억지로 산다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게 최선이었고 제대로 산 것 같다.  이제 우기가 지나고 나면 가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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