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양식 내걸고 빵에 이어 책방까지, 진진 프랜차이즈 시대 시작되나
동이면 금암리 출신 여진(30), 옥천의 새로운 대안 명소를 만들다

#1.요즘 개업하면 ‘기본’이라는 ‘인스타그램’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목 좋은 곳을 부러 피했다. 다 팔면 사람들이 와도 장사를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그래서 웃프게도 ‘장사를 할 줄 모른다’면서 훈수 아닌 훈수를 듣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빵집을 고집했다. 팥앙금을 사서 팔면, 천연발효종 빵을 굳이 만들지 않는다면 생산성은 더 높아지고 단가는 낮아지며 더 많은 빵을 팔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것을 몰라서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은 조금 더 벌려고 수를 쓰는 순간, 처음 빵을 만들려 했던 그 마음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더구나 그는 한술 더떠서 밥 굶어 죽기 딱 쉽다는 책방까지 끼어서 재오픈을 했다. 읍 시가지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양우내안애 아파트상가 건물의 한 귀퉁이를 빌려 다시 개장한 날, 그는 그래도 기뻤다. 8개월 동안 쉰, 아니 긴 여행을 하면서 단련된 마음과 몸의 근육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한번 마음 먹은 일은 곧바로 추진을 해야 했다. 무모하게 보이기도 했겠지만, 주변에 이리저리 물어본 후에 고심해 내린 결정은 어떻게 든 했다. 구읍에 30여 평의 땅을 산 것도 추후에 지용생가가 있는 구읍과 어울리는 작은 빵집을 만들기 위해 기획했지만, 도무지 건물 지을 돈이 마땅치 않아 일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했다. 사실 2016년 지면에서 인터뷰를 길게 하고 그를 다시 만난 이유는 그가 동네책방을 붙여 빵집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했기 때문이다. 이미 지면에 나와 잠깐 인터뷰를 기획했지만, 여전히 뽑아낼 것이 많은 ‘친구'였다. 그래서 다른 내용으로 다시 풀어보기로 했다.

#2.겸손하다.
그것이 드러내기 위한 겸손이 아니라 실제 냉정하게 평가하는 연습으로 몸에 베어 있다. 빵이 인기가 많은 것도 빵이 진짜 맛있다기 보다 기존 빵집과 달리 만든 거 다 팔면 안 팔기 때문에 그것이 차별화와 신비감으로 작동하여 또 하나의 마케팅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얘기 꺼내기 쉽지 않다. 빵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래야 매장이 굴러가고 생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진심이다. 동글동글 굴러가는 투명한 눈망울이 진심을 그대로 말한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우리밀로 빵을 못 만드는 것도 아직 실력이 안 돼서 지난번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우리밀이 빵 만들기 적합하지 않다는 둥의 이런 말을 할수도 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3.일반적이지 않다. 이 사회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대학을 가야 하고 악착같이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획득되는 것들이다. ‘왜’라는 질문을 연거푸 듣지 않으려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격’ 아닌 ‘자격증’이 되어버린 보편성의 인증절차는 정형화와 획일화를 강요한다. 그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기 보다 그는 그의 결을 조심스레 따라갔다.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 무작정 상경해 한 평짜리 고시원에서 불밝히며 영화이론서를 읽고 청담동 CGV에서 영사기사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영화감독이 되는 줄 알았다. 본인 말에 따르면 '눈은 높아' 한예종에 시험을 쳤다가 낙방도 했다. 

#4.도시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옥천에서는 볼 수 없는 거지가 있었고 아픈 사회적 약자들이 거리에 내몰리고 있었다. 삐까뻔적한 건물 사이로 세련된 명품으로 단장한 옷을 입고 영화에 나올 법한 예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그 아름다운 거리에서 다리를 상실한 채 질질 끌며 구걸하는 걸인은 그에게 반전의 충격이었다. 도시에는 정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려왔다. 익숙한 곳으로 아직도 매만질 수 있는 추억이 남아있는 곳으로. 동이면 금암리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어린시절부터 돌봐주신 할머니, 거친 손과 주름많은 얼굴은 혼자 농사일을 건사하며 하나뿐인 손녀를 키우느라 한 세월을 보냈던 할머니가 있었다. 

#5.결혼은 했지만,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 결혼식에 올 양가 하객들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7분 남짓 되는 결혼식을 위해 써야 하는 여러가지 비용과 절차들에 대하여 그는 의문을 가졌다. 불필요한 겉치레 허례허식은 배제하기로 마음 먹고 남편이 될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고 함께 제주도에 가서 서약을 맺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6.빵집 문을 닫고 홀로 50일 정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처음 빵집을 운영하는 기간 동안 설레임도 있었지만, 상처도 많이 받았다. 다 좋은 사람만 있지 않았고 다양한 손님들의 여러 말들 때문에 원치 않는 생채기가 마음에 남았다. 빵을 만들면서 오는 스트레스와 사람을 맞이해야 하는 스트레스, 일인 다역을 해야 하는 일인빵집에서 흔히 겪는 일이라지만, 자영업 첫번째 경험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원래 등산이나 트래킹을 좋아하긴 하지만, 33일 동안 정말 원없이 걸었다. 마음의 찌꺼기 걸으면서 배출됐고 버텨낼 수 있는 근육도 조금씩 만들어졌다. 

#7.빵을 계속 만들고 싶었던 것도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같이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잘 팔리는 빵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은 빵을 만들고 싶었다. 그 빵이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기쁘게 찾는 매장이 되었으면 했다. 새로 고객을 늘이기보다 단골손님을 많이 만들고 싶었다. 지금 다시 찾는 사람도 80%가 단골 손님이다. 얼굴이 익은 사람들, 관계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을 소망했다. 

#8.책방을 열고 싶었다. 내가 읽은 책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 읽어본 책만 판다. 사실 책방에 전시된 책과 매대에 올라온 빵은 여진씨 그 자체다. 베스트셀러를 팔지 않고 인기 많은 빵을 부러 만들지 않는다. 책방 대신 테이블을 더 놓아라. 커피를 팔아라 여러 조언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는 돈 안 되는 작은 책방을 열었다. 그렇게 세태에 영합하고 트렌드를 쫓아가다보면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뭐든 조심스럽다. 사람을 쓰고 사업을 확장하는 일도, 늘 이래도 되나 반문하고 천천히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9.보육교사로 퇴직한 동네 친구 어머니를 채용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공고를 내고 뽑고 싶지는 않았는데 관계안에서 사람을 보고 제안하고 싶었다. 빵집에 드나 들며 관심을 보이는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일을 하고 싶어하셨고 마음이 따스해보였다. 그래서 같이 일하기로 마음먹고 일하는 중이다. 알고보니 동네 친구 어머니였다. 먼 훗날에 진진빵집이 더 확장이 된다면 결혼, 임신, 육아로 인해 경력단절이 된 여성들과 조합형태로 빵집을 운영해보고 싶다. 

#10. 사실 사람들은 오해한다. 오전 11시부터 매대 위에 오른 빵들은 오후 2시면 다 매진된다. 손님들 입장에서는 3시간 남짓 밖에 빵을 팔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만 일하면서 ‘배짱장사’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 아닌 오해도 받는다. '사람을 더 써서 많이 팔아 커지면 되지’ 이런 생각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실 매일 새벽 4시에 나온다. 저녁 8시에 들어간다. 호두, 크랜베리 일일이 다 씻고 굽고 말리고. 손이 가는 일이 너무 많다. 하루 16시간을 꼬박 일한다. 3시간 만에 다 팔리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16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런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물론 체계를 잡고 있고 익숙해지면 일하는 시간은 조금씩 줄어들고 효율도 생길지 모르겠다. 

#11.버겁지만 사실 행복하다. 책방도 그리 잘 되진 않지만, 간간히 손님이 책을 사는 날이면 뛸 듯이 기뻐서 남편에게 기쁜 맘으로 전화를 한다. 아는 지인은 한식과 양식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새 북 큐레이터가 된 것 같아 자존감 ‘뿜뿜’이다.

#12.매장은 지난번 신기리 매장(4평)보다 3배 이상 커졌다. 그만큼 월세도 두 배이상 늘어났다. 새로운 매장은 쾌적하다. 만족스럽다. 진진이란 이름은 본인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기도 하지만, 흥미진진하다의 그 ‘ 진진’, 맛깔난 음식이 풍성하다의 그 ‘진진’에서 따온 중의적인 표현이다. 진진빵집은 진진책방을 탑재하면서 더 흥미진진해졌다. 

#13.꿈을 꿔본다. 지용 시인으로 유명한 옥천이 작은 책방 순례를 할 정도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골목 책방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둠벙의 소금쟁이 책방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고래실의 월간 옥이네를 보고 참 좋았다. 점과 점이 그렇게 이어져 선이 되고 선과 선이 이어져 면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본 가마쿠라에 사는 네 자매 이야기를 다룬 ‘바닷마을 다이어리’란 만화책 시리즈를 참 좋아한다. 그의 매대에는 그 책이 놓여져 있었다. 잠시 잠깐 짬을 내어 책을 펴드는 순간 일상의 행복을 느낀다고 말을 했다. 

#1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을 읽었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싶지만, 삶을 일궈나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필요한 돈만 할 수 있는 노동으로 벌고 쉽다는 생각을 한다. 그 책에서 감동적인 문구를 하나 기억하는 데 ‘빵을 잘 만들기 위해 빵을 만들지 않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쉬는 시간 없이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속성과는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가 내 맘에 쏘옥 들어왔다.   

#15.대학을 가지 않아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서울 영화관과 대전 아트시네마에서도 근무했다. 여행하는 것이 너무 좋아 여행사 직원이 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하는 카페에서 쿠키와 빵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원해 레시피를 보고 독학하다가 어설픈 빵이지만, 맛나게 먹는 것을 보고 마음이 설렜다. 그래서 빵을 만드는 길로 접어들었다. 

#16.고향에서 빵을 만드는 것이 참 좋다. 할머니가 가끔 오시고 빵을 만들어 가져다 드리기도 하는데 아껴서 드신다. 아직도 중학생으로 보이는 내가 창업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참 흐뭇해 하신다. 다음 여행지는 몽골이다. 몽골에 가서 깊은 별을 보고 싶다. 외롭고 그리웠던 고향에서의 모든 삶이 그를 단련시켰다. 고향에서의 삶은 더 이상 추억하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다. 그리고 진행되는 미래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옥천이 더이상 청소년과 청년이 떠나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는 곳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젊은 청춘들이 그렇게 뿌리내리고 연결되면 하나둘씩 지역은 농촌은 바뀔 것이다. 그런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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