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친구가 다니는 직장 동료들과 몇 번 가벼운 등산을 한 적이 있었다. 청주에서 시골로 출퇴근하는 그녀들은 한 자녀가 있는 여간호사와 아직 혼자인 30대 초반의 아가씨. 산행을 하면서 간호사가 내뱉는 언어는 굉장히 노골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착착 감겨 들어오는 뜨거운 언어다. 산을 내려오면서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내 친구들이 나를 천연기념물이라고 그래”“왜?”“아직 애인이 없다고” 임상수 감독의 도발적인 영화 이 가벼운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나는 그다지 새로운 소재가 아니라서 시큰둥했지만
1957년 10월의 어느 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탄광마을 콜우드에 한 소년이 살았다. 당시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렸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퍼졌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별이라니 정말 대단한데? 나도 해보고 싶다!’ 그는 로켓 과학자를 꿈꿨다. 땅속만을 바라보며 살던 탄광촌 사람들에게 하늘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꿈은 놀림거리가 됐지만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어났다. 그는 좌절과 실패에 굴하지 않고 나아갔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엔지니어가 된 ‘호머 히컴’ 이야기다.그로부터 65년이 지난 2022년 8월5일 우리
베넷 밀러 감독은 1998년에 다큐멘터리 로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 편의 극영화를 연출했는데요. 특이하게도 모두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합니다. 데뷔작 는 시나리오 작가 트루먼 카포티를, 두 번째 작품 은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을, 세 번째 작품 는 미국의 재벌 존 듀폰을 하고 있습니다.베넷 밀러는 데뷔 24년을 맞았지만, 그동안 네 편의 작품만 연출했다는 건 특이한 사실인데요. 소문에 따르면 소재와 영화 완성도에 대한 완벽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
하루종일 버스 타고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다녔다. 1980년 1월이었다. 추운 건 한국이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복장은 두꺼운 겨울옷 차림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처음 유럽 여행에 나선 우리는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부지런히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다. 그 때는 외국 여행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이 바빴다. ‘라 스칼라’의 음악회를 보기 위해 그날은 서둘러 박물관과 미술관을 보고 밀라노로 급하게 달려왔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 그냥 그곳으로 직행했다. 문 앞에는 입장
하필 추석 때 코로나를 앓았다. 명절 때 아들네 가려고 했는데 가지 못했다. 또한, 애들이 오지 못했다. 정말 명절에 누구도 올 수 없으니 더 외로웠다. 아파서 서러웠고 외로워서 서러웠다. 먹을 것은 주인집에서 또 질부가 문 앞에 갖다 놓았다. 친구가 코로나 걸렸을 때 딸들이 필요한 건 전화하면 현관 앞에 갖다 놓고 갔다는 말은 들었다. 잘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딸칵 걸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후유증이었다. 몸살같이 쉽게 앓았다.코로나 그거 별거 아니네 했는데 일주일 후 규제가 해제되었다. 다 끝났다, 쉽게 끝나 다행이라며 안심했
황금들녘의 파도치던 너울은 갈바람의 유혹에 몸을 실어 미련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철새마냥 휑하다. 갈바람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벽에 걸린 10월의 달력 한 장을 떼어내니 12장의 달력이 말없이 지나간 시간을 말해주듯 어느 사이 한 장의 달력만 달랑거리며 남겨져있다. 농촌의 일손은 한 모금 찻잔의 여유에 계절을 담아 마시며 다가올 님을 기다리는 맘으로 흙을 다독이며 일구고 퇴비로 그동안의 노고에 영양보충을 해 준다. 자식을 돌보듯 엄마의 따뜻한 품속을 땅에게 전하는 사랑 없이는 거저 내어 주지 않음을 귀농 2년차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 아빠 생각이 자꾸만 났다. 그만하고 싶다, 너무 힘들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여러 번 되뇌었던 말이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나와의 싸움에서 지는 기분이 들었다.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 한 힘든 경험이었다. 그래도 기왕 도전한 것, 동료들과 멋지게 완주하고 싶었다. 이 어려운 과정을 해내면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이겨낼 것만 같았다. 결국 해냈다.지난달 22일 천무관 하랑도장(관장 박정균) 합기도 수련생들은 나를 넘어서는
“저희 표고버섯이 육질이 단단해요. 손으로 잘 따지지도 않아요. 연장으로 따야 돼.”지난 10월17일에 만난 대호장작·임업 이영훈(47, 가풍리) 대표가 가풍리에서 시설재배로 기른 표고버섯 자랑에 여념이 없다. 본업인 벌목 굴삭기를 다루면서 7년째 표고버섯을 키우고 있는 그는 버섯에 별칭도 지어줬다. 표고목이 크고 높다고 해서 일명 ‘대고(大高)버섯’이다.해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철 그리고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철 버섯이 자라는데 이제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되기 전까지가 수확 철이라고. 현재 하우스에 있는 표고목
해마다 기부와 나눔을 꾸준히 이어온 단체가 있다. 올해로 7년째, 청년 봉사단체 ‘복지공감’(대표 공경배)이 지역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을 잊지 않으며 나눔과 상생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복지공감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소중한 회비로 후원이 이뤄졌다.지난달 31일 복지공감은 관내 어려운 이웃에게 써달라며 성금 100만원을 옥천군 행복나눔푸드뱅크마켓에 전달했다. 지난해 10월 100만원 상당의 생필품을 우리고장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한 데 이어 올해도 나눔이 이어졌다.복지공감은 충북도립대 사회복지학과 재학생·졸업생
지난해 여름 지인에게 메리골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어릴 적에는 장독둘레에 봉숭아꽃과 서광꽃을 심으면 뱀과 작은 유해동물이 근접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예쁘기도 하였지만, 다른 목적으로 서광꽃을 심었다. 그런데 요즘 메리골드의 활용도가 또 있다. 메리골드의 개화시기는 봄부터 서리 오기 전 가을까지 15cm-90cm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길에 다니다 보면 메리의 색깔은 주로 황금색이지만, 꽃의 크기가 여러 종류이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메리골드 꽃차를 1년 동안 음용했더니 시력이 좋아져 80대인데도 바늘에 실을 돋보기 쓰
행복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그대의 정감어린 눈빛처럼 천연스러운 몸짓하나 뇌리에 삭여 놓고 지난 세월 망각했던 아련한 기억들을 꺼내어들고 고요한 천국을 두드리다 마음의 안식을 얻었습니다.차마 잊을 수 없는 가슴 벅찬 첫 사랑,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설레던 추억들, 그리움에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그 아픔은 약이 되고 인내의 사랑이 되어서 참된 마음으로 그대를 잊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렵니다.괜한 욕심을 버리고 희로애락의 사랑으로 보듬어 기리는 마음이 되어 세월을 뛰어넘고 영혼의 춤을 추니 그대와 무한한
이제 나이가 먹으면 밖에 나가기가 두렵다. 절룩절룩이 아니면 뒤뚱거리며 걷는 게 대부분이다. 나도 그렇게 걷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오고 말았다. 도로에 걸어가다 턱이 있어 올라서 가려는데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으샤’ 하더라구요. 내가 해야 할 소리를 남이 해서 돌아보니 내 또래 할머니가 했다.자기도 걸어가다 오르려면 ‘으샤’ 해진단다. 우리 동네 가까운 약국에서 진달래아파트로 오는 곳에 집 쪽으로 차를 세우지 못 하게 하느라 세워놓은 것이 있다. 그것이 지나가는 차가 들이받았는지 두 개가 빠져있
벌써 10여년 전이 훌쩍 지난 일이다. 당시 3월의 바람은 살갗을 파고들어 봄을 시기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하는 달이다.당시엔 여행, 관광지도를 제작해 만드는 일을 했다. 배낭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놓고 10kg이 넘으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밖으로 끄집어낸다. 적어도 하루에 50km 이상은 걸어서 조사해야만 제주도 올레 14구간의 트랙을 GPS에 수록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김포공항에서 항공티켓을 예약하여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1구간이 시작되는 시흥~광치기에서 민박집을 찾아 첫 여정을 풀었다.
30년간 참 많이도 변했다. 나도, 내 고향 옥천도. 장날만 되면 발 디딜 곳 없이 북적이던 시장은 상가들이 차지했고, 진흙밭이던 금구천엔 주차장이 들어섰다. 치열한 열정을 가졌던 91년 젊은 나도, 옥천을 따라 많이 변했다.옥천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초점을 생업에 맞추니 자연스레 사진은 흐려졌다. 딸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 때가 되니 그제야 다시 사진이 보이더라. 거창한 카메라도 필요 없었다. 핸드폰으로 옥천을 담고,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내 세월을 담은
내가 젊었을때 서울 가면 눈 감지 말아라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 했다. 그만큼 서울은 시골보다는 복잡하고 산만했다. 서울 사는 고모가 시골 오면 줄줄이 연이어 오는 차를 끊고 지날 수 있어야 서울서 산다고 했다. 전철이 시내를 천천히 가는 것도 보고 신기했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도 시골 사람치고는 제법 잘 찾아다닌 것 같다. 옥천서 서울 가려면 6~7시간 걸렸다. 그것도 연착이 잦았다.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 케이티엑스호로 발전해 지금은 대전에서 서울은 한 시간이다. 이렇게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요즘엔 눈
겨울 동지 섣달은 밤도 길다. 책 보다 시계를 보면 시간은 끝없이 여유를 부린다. 아직도 시간은 밤 12시가 좀 넘어간다. 겨울밤도 길고 따라서 외로움도 길다. 이런 때 어느 곳에 따뜻한 사람이 있어 나의 언 몸과 마음을 녹여줄 수 있을까.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찾아 입어도 데워지지 않고 소리없는 아픔은 깊어가며 마음은 울고 있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웃음과 손짓을 찾아봅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멜로디도 연상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들어도 눈물만이 흐르면서 더 이상의 기쁨은 잊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동지 섣달이라도 옆에만 계시면 따뜻하고
5월14일 나는 대전 선병원에서 무릎 연골 수술을 하였다. 간호병동 602호에 입원중이었다. 우리 5명은 우연히 서로가 너무도 다정다감하게 지내게 되었다. 서로가 자기몸을 아끼지 않고 서로의 불편함과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를 썼다. 먹는 것도 아낌없이 나눠 먹어 가면서 2개월 기간에 정이 들어갔다. 이러다 보니 서로가 퇴원할 때 어떻게 헤어져야 하나 아쉬움과 걱정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는 도중 하나하나 퇴원을 하게 되어 헤어질 때 서로의 전화번호를 물으면서 눈물로 헤어졌다. 이렇게 퇴원을 하여 서로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옥천군에는 1읍8면이 있습니다. 나름 커다란 지역이다 보니 옥천읍~군북면까지 시내버스도 많고 노선도 많이 복잡할 겁니다. 그래서인지 옥천읍을 비롯하여 면마다 고유번호가 정해져 있습니다. 옥천읍 100번, 동이면 200번, 안남면 300번, 안내면 400번, 청산면과 청성면은 500번, 청산순환은 600번, 이원면 700번, 군서면 800번, 군북면 900번입니다. 그러하니 우리 동네인 동이면 지장리에 오는 버스는 앞 번호가 200번이지요. 지장리에 오는 버스도 고유번호가 있어 옥천 종점 출발 오후 1시30분 버스는 번호가 221번이
환경운동연합 중앙사무처는 지구의 날을 맞아 지난 4월2일 골목길 플로깅라이브방송을 진행했습니다. 플로깅이란 스웨덴어로 줍다와 걷기의 합성어로 산책하여 쓰레기를 줍는 환경운동연합의 운동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늦은 감이 슬며시 들었지만, 지난 10월12일 금구천에서 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 자원봉사자들의 봉사활동이 진행된다는 담당선생님의 안내대로 오전 9시50분에 복지관에 결집하여 비닐봉지와 집게를 배부받아 오전 10시부터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더욱 감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날 배부된 비닐 봉지가 친환경적인 소재라 썩는 봉지라는 획기적
어둠이 지나간 뒤 흔적은 늘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일들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생활의 반복됨을 지나치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들 곁에서 지겹게 괴롭히고 있는 바이러스를 나만 잘 지키면 된다는 의식을 지워야 함을 지금 나 자신이 직면하고 있다. 공동체인 사회라는 커다란 울타리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현실을 외면 무시한 탓임을 절실히 공부하고 있다.내가 서 있는 곳은 안전지대이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더불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안일하게 마스크의 번거로움에 짜증을 부린 벌을 달게 받았다. 채찍이 따로 있는 게